2021년 1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서른다섯 번 째 강해) 제목: 헌금은 헌금이어야 합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9:6-10 서론) 작년 말에 밀어닥친 코로나 19의 제천 타격에 즈음하여 교우들에게 직면한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모색하고 동시에 성탄 및 송구영신절기가 맞물렸기에 걸 맞는 제목 설교를 약 2달 동안 진행했는데 오늘부터는 다시 중단했던 고린도후서 강해 사역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목사들마다 성향의 차이 때문에 어떤 이는 제목 설교를 좋아하는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저 같은 강해 설교를 더 선호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취향에 따라 사역하기에 호불호가 있겠지만 세인교회 담임목사는 강해 설교에 더 많이 관심을 갖고 있는 목사이기에 원 동네로 돌아온 느낌이 있는 오늘 주일은 한결 제게는 말씀 선포의 푸근함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모쪼록 우리 교우들은 고린도후서 이해에 집중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지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나라는 민속 경기 중에 씨름이 유명한 나라입니다. 일본의 스모도 있고,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씨름, 몽골의 씨름 등등도 있지만 씨름하면 그래도 민속 씨름이 최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씨름 용어 중에 장딴지 걸기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상대방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그의 장딴지에 발을 걸어 미는 기술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상징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이렇게 사용되는 것이 더 흔해 졌습니다. 줄임말로 ‘딴지 걸기’입니다.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공연히 트집을 잡는 행위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더 세인들에게 익숙해진 이유는 재야 언론인이라고 불러야하는 (다른 별칭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음) 김어준씨가 만들어낸 딴지 일보 때문일 것입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사사건건 정치적 저격수 역할을 한 것이 딴지 일보이기에 단어 자체가 아주 적확한 재야 여론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근래 들어서는 지금의 정부에 대하여 딴지 역할을 톡톡히 한 사람이 아마도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라고 지칭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아, 정치 이야기를 하려고 이들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아니니 긴장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들의 이름을 수면 위로 올린 이유는 ‘딴지’라는 단어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딴지 걸기’ 혹은 ‘딴지를 걸다’ 정도로 쓰이는 이 단어의 용례는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눈치 채셨을 줄 압니다. 이 단어는 신앙생활에도 일맥상통합니다.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기에 흐릿해졌을 것이라고 보고 본문 이해를 빠르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본론) 바울은 마케도냐 지역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한 네 번째의 편지인 본서를 썼다고 했습니다. 이 편지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단락은 2:12-7:16절까지인데 고린도교회 지체들 중에 존재했던 본인의 사도적인 권위를 부인하는 자들을 향하여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대단히 강력하게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는 메시지를 남긴 단락임을 이미 우리는 살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큰 단락이 8,9장인데, 바울의 세 번째 편지인 눈물의 편지인 서신 b를 받아든 고린도교회 형제들 중에 다시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고 회심한 형제들에게 아픔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을 위해 아름다운 구제 연보를 하나님께 드려 그들을 돕자는 메시지임을 살피고 있으며, 오늘 설교가 이 두 번째 단락의 종결 부분입니다. 10:1-13:10절까지 마지막 세 번째의 단락인데 다시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과 복음에 대한 강력한 열정을 선포하는 부분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메시지는 바로 구제 연보를 독려하는 클라이맥스 부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을 위해 드려야 할 구제 연보의 자세에 대해 천명한 레마를 담기 원합니다. 본문 6-7절을 나누겠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 구절을 지금 접하고 있는 교우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이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를 말입니다.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최선을 다하는 순종을 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그건 성경에 적힌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나에게 적용하라는 것은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는 동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 믿으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반응은 우리 교회뿐만이 아니라 여타 다른 교회들도 도진개진일 것입니다. 전제하거니와 저 역시 이런 영적 기상도를 알기에 후자에 있는 교우들을 각성시켜 전자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임을 밝힙니다. 다만 그래도 목사가 성경에 나오는 텍스트를 비굴하게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설교는 할 수 없기에 원론적인 메시지를 증거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에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했습니다.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억지로 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더불어 즐겨내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도 했습니다. 적어도 바울이 제시한 내용은 구제 헌금에 국한하지 않고 일체의 헌금생활에 공히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자세가 이것 말고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합니까?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드리는 자세를 견지하고 헌금생활을 하면 됩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교회에 등록한지 얼마 안 되는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갖습니다. 그 성도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묻고 권면하기 위한 심방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분에게 물었습니다. 성도님은 우리 교회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으십니까? 질문을 받은 그 성도는 조금도 주저 없이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헌금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하지만 봉사를 하라고 하면 그건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느낀 것 중에 하나가 헌금생활이 제일 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돈을 내라면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하지만 봉사는 사절합니다.” 아주 세속적으로 판단하겠습니다. 교회에 이런 성도가 있으면 너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심방을 갔던 목사님이 이렇게 글에 적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신자들이 괴물로 변해가고 있음을 처음으로 느꼈다.” 너무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돈을 내라면 내고, 많이 내라면 낸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직격하겠습니다. 성도의 가장 귀한 영적 행위인 헌신을 돈으로 바꿔치기 하면 된다는 아주 질 나쁜 종교인의 행태입니다.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헌금생활을 잘 하라고 하는 이유는 물질 때문이 아닙니다. 헌금을 드릴 때 헌금을 받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공식이 가능해 집니다. 물질은 하나님 앞에서 하등가치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고백이 헌금생활입니다. 물질도 하나님에게 통제 받는 가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헌금생활입니다. 어제 새벽에 보았던 누가복음 12:34절은 우리에게 대단히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 구절에 주목해 주십시오. 영어성경 NLT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Wherever your treasure is, there the desires of your heart will also be.”
직역해 드리겠습니다. “너의 보화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너의 마음의 욕망이 또한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이겠습니까? 물질, 보화, 돈은 하나님의 가치와 동일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들(물질, 보화, 돈)과 같은 평행선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천명한 헌금의 태도는 너무나도 선명한 성도의 헌금 태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① 많이 심는 것 ② 정한대로 하는 것 ③ 인색하지 않게 하는 것 ④ 억지로 하지 않는 것 ⑤ 즐겨 하는 것 이 5가지는 성도된 자가 성도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헌금 생활의 지표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본문 8-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 마지막 단락은 힘과 용기가 됩니다. 이미 살핀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마케도냐 지역에 신어졌던 그리스도 예수의 공동체 중에 가장 풍요로운 지역 공동체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하여 갖고 있었던 염려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구제 연보를 많이 드림으로 인해 혹시나 우리도 가난해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권면합니다. 오늘의 언어로 8절을 쉽게 풀겠습니다. “너희들에게 구제헌금을 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그 마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이 착한 일(구제 헌금)을 하게 하신 하나님은 너희들을 더욱 풍성하게 하실 것이다. 동시에 은혜까지 부어주실 것이다. 이 약속은 이미 우리 선조인 예언자 이사야 55:10절을 통해서도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를 도운 자들에게는 주님이 허락하신 의가 영원히 머무르게 할 것이라고.” 지금까지의 설명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선언한 메시지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 세인 지체들이 건져 올려야 하는 교훈을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 헌금은 헌금이어야 합니다. 딴지 걸지 마십시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내가 헌금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정말로 착각하면 안 되는 부분입니다. 헌금생활을 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다면 그건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헌금생활은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제가 쓴 대로 일(work)이 아니라 사역(Work)임을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직전 교회에서 겪었던 아픈 일입니다. 당회원 중에 상당히 부유한 자에 속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십일조는 하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십일조는 정직하지 않은 십일조였습니다. 아니,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십일조였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장로까지 되었고, 위치가 있으니 십일조를 안 할 수는 없고, 해서 마지못해, 인색함으로 헌금하는 자가 아니라 종교적 세금을 내는 자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렇게 행했던 일을 참담함으로 지켜보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행한 악한 일을 주변 사람들에게 정당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부화뇌동한 단어가 ‘생활의 십일조’였습니다. ‘생활의 십일조’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는 압니다. 당시 무소불위의 교회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당회원에게 대적하는 것은 자폭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더 이상은 교회 질서를 위해 묵과할 수 없어 그를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적 헌금생활을 왜곡하지 마십시오.” 그 이후, 그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교우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성경적 헌금의 의미를 왜곡시키거나 변질시키는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드리는 선한 이들에게 딴지를 거는 악한 일입니다. 어제 새벽에 보았던 말씀을 또 하나 복기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2:13-15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이 구절은 많이 인용하는 복음서의 내용은 아니지만 오늘 설교의 성경적 내증으로 아주 적절하기에 소개합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라고 누가가 익명으로 인용한 이 사람은 12:1절에 기록된 수만 명 중에 해당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폭을 조금 좁히면 아마도 제자들보다는 바리새인들 중에 그 누구일 수 있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들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이해타산에 머리가 비상한 그 누구이기에 예수께 질문하여 뭔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물질적인 혜택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 질문합니다. 형에게 더 많이 간 재산 분배를 주님의 권위로 공정하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한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주님이 예전 같지 않은 감정적인 표현을 하나 그에게 던집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을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언짢은 당신의 감정을 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주께서 이 사람을 질타한 이유는 주님을 물질적인 가치와 동일하게 여긴 것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은 성도가 드리는 헌금을 열납 하시는 주군이시지 같은 가치가 아닙니다. 해서 주님이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선언하셨던 말씀이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저는 목회를 한 지난 31년 동안, 한 가지는 물러서지 않고 타협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물질로 교회적인 권세나, 기득권적인 세를 차지하는 도구로 삼는 자들을 호리라도 용서하지 않으려 했던 목회적인 자세였습니다. 이전에도 그렇게 했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 사역은 세인 교회에서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헌금’(OFFERING OF DEVOTION)을 헌금으로 드리는 행위에 대하여 격려하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헌금을 헌금이 아니라 세속적 물질의 가치로 상납의 가치(TAX)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자가 있다면 저와 싸워야 합니다. 혹여 본인 혼자서 그런 질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버거워 부화뇌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공동체에서 함께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걸출한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가 아주 좋은 책을 썼는데 시작하는 글머리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학문적 신학은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한 것, 즉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참된 삶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대체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신학이 그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의 손실이자 세상의 손실이다.” (볼프,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ivp,15.) 정상적인 신학을 하고 정상적임 목회자의 길을 걸은 정상적인 목사는 정상적인 상식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볼프가 말한 의견에 1000% 동의합니다. 이강덕 목사가 1981년에 신학도가 되어 신학을 연구하여 온 이후 지금까지 40년 동안 신학 공부를 손에 놓지 않고 치열하게 달려온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의 참된 삶’이라는 상식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근본주의적 수구성을 갖고 있는 한 목회자가 정부가 코로나를 빗대어 강제하며 핍박하고 있는 이 시대에 대면예배에 목숨 걸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다가 코로나에 걸려 죽으면 순교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영적 착시 현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신학은 신학교에서나 신학이지 목회 현장에서는 필요 없다고 치부하는 무지 때문입니다. 이런 무지는 성도들의 헌금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헌금은 돈대고 돈 먹는 식의 야바위꾼들이 자행하는 도박행위가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가치를 물질의 가치와 동등하게 여겨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일체의 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영적 행위입니다. 이 헌금의 행위에 대하여 잘 사는 방법, 부자 되는 길, 자녀들을 복 받게 하는 복채, 모든 일들이 잘 되게 하는 로또로 둔갑시키는 작태들을 멈추어야 합니다. 불편하다고 딴지 걸지 마십시다. 팀 켈러 목사가 이렇게 일갈한 부분을 제가 밑줄 그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숭배자가 우상을 상대로 하는 일이 세 가지다.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한다.”(팀 켈러, “내가 만든 신”, 두란노, 106)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딴지 걸지 말고 나에게 물어보십시다. 내가 사랑하는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 앞에 모두 드립니다 모든 아픔 모든 기쁨 내 모든 눈물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어제일과 내일일도 꿈과 희망 모두 드립니다 모든 소망 모든 계획 내 손과 마음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