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일어나는 교회(추수감사절 예배 전 실황)2024-02-28 17:34
작성자 Level 10

2019년 11월 24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제목일어나는 교회

본문사도행전 3:1-10

 

서론)

 

기독교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고전 중의 고전으로 알려진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보면 다음의 명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지 않고 사는 것이 초자연적인 맹목이라면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악하게 사는 것은 가공할 맹목이다.”(블레즈 파스칼, “팡세”,민음사.p,358.)

파스칼의 지론대로라면 오늘 우리 주변에는 가공할만한 맹목으로 살아가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자화상을 오랜만에 음미해보고 싶었습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한 사나이는 물론 일제 강점기에 모든 것을 다 잃고 살아가는 라는 주체입니다.

그런데 저는 왠지 이 를 오늘의 교회로 해석하고 싶어졌습니다.

미웠다가 가엾어지는 존재아마도 저에게는 분명히 교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교회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나약해지고힘이 없어지고심지어는 상식에 눈감은 것 같아 미워지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다시 그 교회는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교회를 향해 이렇게 읊조리며 소리치고 싶습니다.

교회여일어나라.

 

본론)

 

본문은 전인격적으로 오신 성령 하나님을 체험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일으켰던 기적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던 요한예수를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다가 적극적으로 주군이신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이 두 사람은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성령과의 만남이라는 드라마틱한 영적 체험을 한 이후에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제 구시(오후 세 시기도 시간에 성전을 향해 올라갔음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이들이 올라간 성전의 통로는 미문(美門)이었습니다.

이 문을 미문 즉 ‘beautiful gate’라고 호칭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문들 중에서 금과 은으로 도배한 화려한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으로 성전을 통과하려는 사람이 당연히 많았기에 그날 기도는 물론 복음 증거의 목적을 가졌던 이 두 사람이 미문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이 두 사람은 뜻밖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라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걸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22절을 소개합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이 걸인의 나이를 누가는 약 40 세로 추정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지난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걸인은 지난 세월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날도 미문에서 성전에 방문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걸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위치해 있는 지점을 통과하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걸인은 다른 여타 사람에게 했던 그대로 몇 푼의 물질을 구걸했습니다.

그의 소리를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그 남자가 구걸하고 있는 그 장소에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물질에만 집중하던 걸인이 두 사람의 소리를 듣고 반색했습니다.

그 동안 미문으로 들어가던 사람들 중에 능동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이 두 사람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걸인은 맹목의 소리 지름에서 의도가 있는 시선 멈춤으로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본문 3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여기에 소개된 보고는 헬라어 에이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가장 단순하게 누군가를 볼 때 쓰는 단어인 ‘see’의 의미입니다.

헌데 우리를 보라는 두 사람의 소리를 들은 걸인이 두 사람을 보았다고 기록한 누가의 표현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여기에 기록된 바라보거늘의 헬라어 단어 에페코는 집중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충분히 걸인의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동적인 구걸에서 능동적 집중이라는 패러다임으로 태도를 바꾼 걸인의 마음을.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걸작인 마음의 혁신’(Renovation of the Heart)에서 기막힌 갈파를 내놓았습니다.

의지(심령마음)의 기능은 전적으로 생각(사고와 감정)의 내용에 의존한다의지/심령의 기능은 선택하는 것인데그것은 생각과 감정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의지는 의지를 품는 순간 생각과 감정의 실제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제한된다그러므로 생각과 감정도 의지 곧 선택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즉 의지는 인격의 핵심이다.”(달라스 윌라드,“마음의 혁신”, 복 있는 사람,p,241)

그렇습니다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걸인이었던 이 남자는 두 사람의 인격적인 의지로 선포한 외침을 인격적인 의지로 반응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의지 對 의지로 소통한 이 두 부류의 만남 과정을 움직이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단 1%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틱한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절정을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집중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던 걸인에게 두 사람 중 베드로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아주 단순히 해석하겠습니다.

걸인이 아마도 기대했던 더 큰 물질은 은과 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베드로의 선언 내용을 누가가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사렛 예수’ 가 무슨 의미입니까?

경멸의 의미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는 비아냥이 예수님에 대한 당시 세속적 인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판을 뒤집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이 문장의 자구를 절대로 가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시골 촌뜨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 했던 예수그 분이 오늘 너를 일으켜 세우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베드로는 강력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누가가 결론을 맺은 본문 기사의 정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7-10절을 가슴 벅찬 심정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40년 동안 빌어먹어야 했던 고루한 인생이 일어났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누가의 감격은 단순히 일어난 감격으로 마무리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는 겹 감격의 보고를 남깁니다.

일어난 자는 그토록 자기도 학수고대하며 바라고 바랐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들어간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보며 그 미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을 누가는 기막히게 기록했습니다.

 

ejkstavsew"”(엑스타세오스-놀라니라)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단어가 우리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아지경에 들어갈 때 표현하는 엑스터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그에게 일어난 기적이 얼마나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더불어 홈 커밍데이 축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입니다.

떨어져 있는 가족들과 함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이런 저런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들까지 함께 초청하여 1년을 결산함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들 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아름다운 축제의 장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이 귀한 자리에 모인 교우들과 형제자매들을 향해 오늘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가 많이 고민하고 기도하던 중에 본문을 택해 함께 우리 모두에게 주는 선한 영향을 공급받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가톨릭 신부가 있습니다.

여러 글을 쓰면서 균형 잡힌 신앙을 강조하는 김인국 신부입니다.

그가 7년 전손석춘 기자와 김기석 목사의 편지 대담을 엮어 만든 기자와 목사두 바보의 이야기라는 책에 대한 리뷰 글을 실었는데 그 때 읽은 그의 글이 저를 후려쳤던 기억이 있어 한 대목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교회가 밥값을 못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는지 아시시의 성인 역시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프란체스코야내 집 좀 고쳐 다오너도 보듯이 내 집이 다 망가졌단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그때에 그가 십자가의 눈물과 한숨 사이사이에서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에 입 맞추며 불렀던 노래가 이렇게 전해집니다.”(손석춘김기석, “기자와 목사두 바보 이야기”, 꽃자리, p,342)

 

나의 교회야나의 교회야,

네가 아무리 못 생겼어도

너는 언제나 나의 교회지

 

조금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사랑하고여러분이 사랑하는 교회가 망가졌고또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우리 교회가 참 못생겼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또 하나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 교회가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부인하고 싶으나 부인할 수 없는 내 사랑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가장 존귀한 주님의 교회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추수감사주일 이 시간에 참 못생겼지만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고개를 돌릴 수 없는 내 사랑하는 교회를 향한 심기일전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저는 내 사랑하는 교회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대합니다.

일어나서 성전을 향하여 뛰어 들어가 찬양했던 본문의 앉은뱅이처럼 그 감격을 다시 교회가 회복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려면 오늘 추수감사주일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세인 교회와 세인교회를 포스트로 하여 고향 교회의 기도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권면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아직은 교회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교회의 다짐을 재확인시키는 대단히 중요한 작업일 수 있기에 결심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보며 말씀을 전합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본질에 대하여 눈을 감은지 오래된 것 같아 매우 유감입니다.

교회가 이 본질에 대하여 눈을 감자마자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비본질인 은과 금입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교회만 힐난한다고 착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더 큰 착각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은과 금에 혈안이 된 비본질의 교회에 나타나는 최고의 비극은 그 교회의 구성원들 역시 똑같이 은과 금에 목적을 두는 괴물 신자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은과 금에 목적을 두는 교회와 신자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축복을 쏟아부어주는 사유물로 여긴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 가운데 가장 절망적인 세 가지 시대를 말하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노아 시대소돔과 고모라의 시대 그리고 사사 후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사기 17장은 절망적인 랜덤 시기의 압권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었던 미가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살면서도 버젓이 종교적인 행위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 사람으로 보고됩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거주하면서 성전을 돌보아야 하는 한 레위 지파 청년이 에브라임으로 이주하여 먹고 살 것을 찾았습니다.

그는 레위인이었기에 마땅히 이스라엘 공동체가 드리는 십일조를 갖고 살아야 하는데 이미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런 율법을 무시하며 살았기에 먹고 살기가 막막한 이 청년이 일자리를 찾아 에브라임 산지까지 유랑하며 들어온 것입니다.

마침 그곳에는 막 살던 미가가 있었는데 그가 이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미가에게 그는 최적의 사람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해서 그를 고용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자기 가정을 축복할 사설 제사장으로 고용한 것입니다.

청년은 먹고 살 일자리를 찾았고미가는 자기 가정에 복을 빌어줄 레위 사람을 만났으니 금상첨화의 조합을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자기들의 일을 행합니다.

이 일을 사사기 기자는 이렇게 고발합니다.

사사기 17:11-13절을 묵상하겠습니다.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대단히 위험한 사상과 종교인들의 행태를 사사기 기자가 보고한 이 내용을 비평하겠습니다.

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완전히 율법 조항을 버린 시대였기에 레위 청년이 성전 돌봄이 아닌 다른 일로 먹고 살아야 하는 비극의 시대를 조명한다.

② 미가가 이 청년을 자기 가정을 위한 사설 제사장으로 고용하는데 제사장 임명은 제사장만이 하게 되어 있는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은 물론 개인의 사익을 위한 제사장 선출은 전혀 성서적이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③ 이 청년은 제사장 자격이 없었다이 청년은 나아르’ 즉 미소년이었다민수기 4장에 의하면 제사장의 자격 연령은 30-50세이다율법을 어긴 것이다.

④ 제사장 한 사람이 행하여야 하는 의무가 전혀 성서적이지 않았다개인에게 복을 주는 로봇 같은 제사장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전혀 신학적이지 않다.

사사 시대에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행되었을까요?

본질인 하나님의 법이 상실되고비본질인 사람이 좋을 대로의 삶을 막 살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사설 제사장을 고용하여 오로지 개인의 복을 빌며 살았던 사사시대는 은과 금이 본질로 둔갑된 시대였기에 가장 큰 영적인 암흑기라는 오명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때교회가 이렇게 망가지면 그 시대도 절망이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늘 한국이라는 사회가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가 된 것은 교회가 비본질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사회가 이렇게 망가진 이유의 한 복판에 비본질에 목숨을 건 신자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다시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은과 금에 빠져 있는 현실에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대사회적으로도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월은 교단마다 1년을 결산하는 달입니다.

장로교회는 공동의회를성결교회는 사무총회가 열리는 달입니다.

이 두 회의는 1년 중에 가장 감사가 충만해야 하는 회의입니다.

지난 1년을 달려온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현실은 감사가 아닌 그 반대에 있다는 데에 아픔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들은 우황청심환을 먹고 회의에 들어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사들이 가장 많이 쓰러지는 회의이기 때문입니다.

1년 예산을 세웠는데 그 예산에 도달했나도달하지 못했나는 그 목사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어처구니없는 심판장으로 전락한 것이 공동회의요사무총회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목사들은 예산 도달을 위해 가진 편법을 동원하여 헌금 갹출에 혈안이 되고성도들은 그 갹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숨바꼭질을 하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너무나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은과 금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괴물 같은 현상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물질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함으로 나타나는 능력으로 대 사회를 섬기는 일이며그 복음을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일입니다.

동시에 이 능력을 공급받은 주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그 삶을 반드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미문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았던 본문의 걸인처럼 전락해 버린 조국교회가 아픕니다.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몹시 아픕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금년은 세인 교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지닌 10년을 뒤돌아봅니다.

세인교회 역시 조국교회가 아파하는 현실 한 복판에서 지난 10년을 달려왔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10우리 교회는 이 아픔과 맞서 싸웠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골리앗으로 남아 여전히 건재한 비본질적인 교회와 맞서는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참 열심히 싸워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비본질적인 것으로 무너진 한국교회와 또 싸우며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그게 우리 세인의 운명이요사명이자 삶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들이여그리고 세인의 기도로 살아가는 가족들이여!

이 주존감에서 후퇴하지 맙시다.

우리 교회도 일어서고조국교회도 일으켜 세웁시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도록 전진합시다.

주님이 도우실 것이며성령 하나님이 앞서실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6절을 다시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내게 있는 그것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잃지 않는 우리 세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합니다.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내 비웃음

나를 향해 돌아오고

어리석고 미련한 그 백성들

나의 모습과 같네

 

찢기고 상한 나의 영혼을

끝까지 사랑한 아버지의 그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으리요

내 생명 다해 주 노래하리라

 

내 생명의 근원되신

나의 삶의 이유 되신

내 모든 것 나의 전부 아버지

나 다시 일어섭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나

믿음없어 실패한 나

그런 나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