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언제나 두 부류는 존재했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17:1-9 서론) 2009년 6월 13일이라고 제 책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제 이 책을 읽은 지가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넘어 흘렀습니다. 제 서재에 비치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마이클 호튼 교수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를 읽은 지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 이 책이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저는 개인적으로 열광했습니다. ‘긍정의 힘’, ‘잘 되는 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무엇이 복음인지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죄악이 교회에서 판을 칠 때 당시 한국교회를 향하여 정신이 번쩍 나게 했던 핵폭탄과 같았던 책이었기에 저에게는 더 더욱 애착이 가고 기억에 남는 양서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입니다. 미국에서 교회를 병들게 했던 원흉으로 손꼽는 것들이 있습니다. 번영신학에 물든 교회, 엔터테인먼트 교회, 상담학을 복음 위에 두는 교회, 이머징 교회 등등입니다 마이클 호튼은 이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괴물이라고 맹공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불행한 것은 이런 괴물을 조금의 검증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한국교회가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 역시 병들게 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기막힌 시기에 이 책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행운이었고 저 같은 신학적인 기초를 갖고 있었던 목회자들에게는 정말로 신선한 영향을 주었던 책이었습니다. 마이클 호튼 교수의 한 마디 충고를 들어보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혹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당장 절박한 필요들을 채워 나아가는 것에 급급하여 진정한 필요들을 실제적으로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포는 덮는다.”(p,307) 제가 이 글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이 구절에 밑줄을 긋고 별표를 세 개 기록해 놓은 흔적이 책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때를 떠올려보았습니다. 호튼 교수의 지적을 한 예를 들어 조금 쉽게 풀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는 젊은 목사 시절, 학위 공부에 집중하다가 육체적으로 지병을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편두통입니다. 해서 30대 초반부터 시작해서 40 중반까지 편두통으로 인해 적지 않은 삶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특히 고통의 절정기였던 진해에서 사역할 때는 목회를 포기할까도 생각할 정도로 편두통의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정신과 전문의를 통해 처방 받은 것이 ‘카페고트’라는 약이었습니다. 이 약을 먹으면 그래도 편두통의 통증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약물이 중독성 약물이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 약물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동반하는 약물이었습니다. 두통 완화는 이루어졌지만 체중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혈관성 부작용들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뇨기과적인 부작용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성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약물의 투여량이 많아져서 이모저모 다른 장기에 좋지 않은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뒤늦게 깨달은 지는 중독 이후였습니다. 당시 해군 군의관으로 재직하던 신앙 좋은 신경과 전문의를 만났고 그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카페고트의 약물 중독에서 벗어났던 실례가 저에게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약 한 달 동안의 고통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했다는 점입니다.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다른 약도 먹지 말라는 신경과 의사의 말을 듣는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의 약물 금단 현상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약물 중독을 벗어나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에 맞추던 약 1개월 동안 편두통의 고통이 너무 심할 때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카페고트’로 보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카페고트는 저를 영원히 죽이는 약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약물만 있으면 죽어도 좋겠다는 심정으로 그 약물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결국 그 고통의 시간을 잘 버텨서 지금도 가끔 약한 편두통으로 고생을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치유된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카페고트’를 찾았던 것은 마이클 호튼 교수의 말대로 당장의 절박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하고 유일한 것을 덮어버리려는 시도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혹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당장 절박한 필요들을 채워 나아가는 것에 급급하여 진정한 필요들을 실제적으로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포는 덮는다.”(p,307) 저는 마이를 호튼의 말을 10년 전에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헌데 더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의 10년 전 지적을 오늘 10년이 지난 지금 더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두 종류의 부류가 존재합니다. 어떤 존재들입니까? ① 내가 원하는 것이 절박한 필요라고 주장하는 부류입니다. ② 반면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필요에 주목하는 부류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두 부류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심지어 내일까지도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 상존한다는 점입니다. 이 부류의 상존은 언제나 불편하고, 또 때로는 긴장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 부류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제 2차 전도여행의 과정이었던 데살로니가 사역에 관한 보고입니다. 본문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항상 행하던 대로 유대 율법을 강론하며 가르치는 장소인 빌립보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니 이곳에 3주 동안을 거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그의 일행과 더불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고 바울과 실라의 말을 인정하였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데살로니가에 거주하고 있던 경건한 헬라인들이 복음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상류층에 있던 귀부인들도 역시 바울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은 바울을 따르는 믿음의 진보를 나타냈습니다. 이들 부류가 누구입니까? 앞서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주님의 원하시는 필요를 알아차리고 그 필요를 추구한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바울을 핍박하는 부정적인 부류들이 존재하였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데살로니가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입니다. 여타 다른 지방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들 역시 바울을 아주 강하게 핍박하고 거부하는 부류들이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바울과 실라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수색합니다. 하지만 이미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야손이라는 형제를 붙잡아 이 사람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도왔다는 누명을 씌워 그들을 체포합니다. 졸지에 이런 고난을 당한 야손과 그의 지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보석금을 내고 방면되었다고 누가는 본문에서 보고합니다. 7-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우리는 두 가지의 설정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1) 진리에 눈감은 부류들에 대하여 반면교사 삼기입니다.
본문 5절을 집요하게 다시 한 번 나누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추측됩니다. 동시에 이들은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회당을 맡아 주관할 정도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 종교에 대하여 빠삭한 사람들입니다. 헌데 이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하여 직접적인 거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들이 이런 거부감을 드러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한 단어를 주석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하여 반기를 든 이유를 누가는 ‘시기하여’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단어 ‘젤로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5절에서 이 단어를 ‘시기하여’라고 번역했지만 더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열심을 내다.’, ‘열심을 품다.’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저는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를 눈여겨보기로 했습니다. 열심을 품는 자가 왜 시기합니까? 그것도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인 그리스 사람(마케도냐)이 아닌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신앙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던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시기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약관화합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만족을 위한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관점은 ‘자기만족을 위한 열심’이라는 표현입니다. 설교 준비를 위해 오늘 본문과 관련한 참고 도서를 10여 권 정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중에 제 마음에 동의하게 한 해석은 역시 이재철 목사의 해석이었습니다. 조금 긴 글이지만 그 부분을 소개합니다. “일단의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베푸신 생명의 역사를 기뻐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로 인해 바울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설교 내용에 시비를 걸면서 바울의 주장이 틀렸다고 공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바울의 설교를 통해 일어난 결과로 인해 바울을 시기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유대인 회당의 지도자 그룹에 속한 유대인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설교를 통하여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생명의 역사가 뜨내기에 불과한 바울을 통해 일어났음을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시기한 그들이 뜨내기 바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이 이후 자신들의 능력과 행위를 얼마나 과장했겠습니까? 그들이 바울을 시기했다는 것은 자신들을 뜨내기 바울 위에 올려두는 교만에 빠져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교만에 빠진 그들이 바울에게 응당 돌려야 할 존경과 명예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뜨내기 바울로 인해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위가 훼손되었다는 피해의식으로 발작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흉기로 돌변한 것입니다.”(사도행전 속으로 11,pp,57-58) 이 글을 읽다가 아주 묘한 느낌이 저에게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 세인 공동체를 포함하여 일체의 한국교회 안에 정말로 유감스럽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아픔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당에서 전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을 직시하십시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저는 이 구절에서 소름이 끼치는 전율함을 경험합니다. 바울이 3주 동안 안식일에 손에 든 것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며 신줏단지처럼 여기는 성경이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그라페’라는 단어는 써진 글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율법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울은 이 ‘그라페’를 들고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의 기록을 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풀이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렇습니다. 바울이 전한 것은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죽으셨다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 예수를 증언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언어로 무엇입니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입니다.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아주 예민한 한 가지를 전제합니다. 친구 목사가 종의 세 번째 책인 ‘시골목사의 목양심서’를 위해 보내준 추천사 내용 중에 이런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박한 설교, 당장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설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강단을 오염시키는 현실 속에 있다.” (오생락. 추천사 중에서) 저 또한 친구의 이 지적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친구의 이 내용을 전제하면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일체의 천박한 설교, 쓰레기통에 당장 집어던져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설교가 매우 많습니다. 어떤 설교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외의 설교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제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역설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나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다시 살아나셨고, 나를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단에서 선포될 때, 이 선포는 취사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가슴으로 아멘 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감동의 메시지보다 자기만족을 위한 열심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기만족을 건드리면 진리, 예수, 십자가의 메시지가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굳게 믿는 자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자들의 공통점은 마치 오늘 데살로니가에 있었던 유대인들처럼 진리에 눈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리에 눈감으니 예수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이고, 예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어떤 것이 진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신앙의 필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이런 자들은 결국은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변화된 사람들을 도리어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들은 제 2차 전도여행의 시기에 데살로니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도 존재한다는 것에 아연실색합니다. 이 부류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2) 진리에 변화되려고 몸부림치는 부류에 대하여 진면교사 삼기입니다. 본문 4절을 읽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이 구절 역시 다가오는 감동이 큰 구절입니다. 바울이 선포한 예수의 케리그마를 들었던 회당 공동체 안에 있었던 헬라인 큰 무리, 그리고 귀부인들이 변화되었음을 누가가 묘사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 누구인지를 추적해야 합니다. 이들은 헬라파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이 이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매 주 안식일마다 회당에 몰려온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의 회당 공동체는 유대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자들이 모여 차선으로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이 정기적으로 회당에 나왔다면 이들의 유대교적인 신심은 분명히 깊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변화된 자들을 소개하는 이 구절에서 이들의 신분까지 묘사했습니다. 경건한 자, 그리고 귀부인이라고 적시했습니다. 동시에 이렇게 표현을 했지만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통칭했습니다. ‘티스’ 즉 익명의 대명사를 씀으로서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보고합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큰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신앙의 필요성에 반응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자들은 지위고하와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 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여백을 독자인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는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었던 익명의 예비 된 영혼들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고 아마도 분명히 이들을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교회로 성장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8절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학교에서 한 제자가 수업 중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를 하시는 동안 번-아웃(탈진)을 경험하셨을 텐데 그때마다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셨지요?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겪으셨던 가장 큰 실망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주십시오.” 질문을 받고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장 큰 목회의 실망은 아무리 목회를 해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고, 번 아웃이 되는 경우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극복은 그래서 갈라디아서 1:10절을 다시 아로새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학생들이 대단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변화하지 않는데 왜 목회를 하느냐는 몸짓의 질문들이었습니다. 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다시 말했습니다. “그래도 성령은 일하시니까.” 오늘 설교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겠습니다. “그래도 그 어떤 사람이 있으니까” 결론) 어느 셀 심방에 가서 지체에게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이젠 나는 지체에게 더 이상 전할 말이 없다. 할 말이 더 이상은. 그렇지만 오늘 한 마디만 더 하자. 그래도 그 동안 들은 게 얼만데.”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래도 그 지체가 오늘 설교의 두 번째의 부류가 될 가능성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과는 그 지체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공동체 지체 여러분! 언제나 두 부류들은 존재했습니다. 진리에 눈감은 부류와 진리에 변화되려고 몸부림치는 부류입니다. 좁히겠습니다. 데살로니가에도 존재하였고, 오늘 우리 세인 교회도 존재합니다. 지난 주간, 지전도사가 대화중에 저에게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목사님, 제가 아는 어느 교회 목사님이 사역하는 로컬 처치에 신자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귀가 화려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듣다가 뭔가 감춘 것이 드러난 것 같아 얼굴이 화끈 거렸습니다. 우리 세인 교회는 심장이 화려한 교회인가? 아니면 지 전도사 말대로 귀가 화려한 교회인가? 마이클 호튼의 벼락을 하나 더 전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예수의 이미지에 정서적으로 기생하는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으로 변질되고 있다. 최근 몇 십 년간, 바울이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롬9:33),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라 말한 이 메시지를 전할 배짱이 충분히 있음을 나타내지 못했다.”(그리스도 없는 기독교,p,33.) 이강덕 목사도 절치부심하게 만드는 호튼의 벼락이었습니다. 언제나 두 부류들은 여전히 있어 왔기에 그냥 담임목사는 이렇게 전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있으니까’ 전혀 변화가 없는 돌덩어리와 바위를 향하여 낙수하는 물방울은 떨어뜨리는 사역은 임기 동안 감당하기로 말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예배하는 우리 세인 교회 성도들 중에 그래도 ‘어떤 사람’이 오늘도 생겨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주님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의 무거움이 아니라오 우리의 무지함으로 아파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었소 골고다 그 언덕길을 우리 위해 걸어야 했던 그는 비난과 손가락질에 물과 피를 흘려야 했건만 험난한 주님의 십자가 몹시도 무거웠건만 우리의 비난과 채찍에 재물 돼야 했던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나 구원 얻었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이 한 몸 받치리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음으로 사랑을 하신 것을
우리의 주님께서 자기 몸 다하여 죄인을 사랑 하신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