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라디아서 5:1-6
제목: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서론)
오늘 설교 제목은 도발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로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작가 이문열이 그의 소설 제목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저는 소설을 읽을 때 생각했습니다.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날개 짓을 하는 새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새들이라고 해도 날개 짓만 잘 할 수 있다면 그 새들에게 추락은 추락이 아니라 더 넓게 보는 여행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시기는 197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더불어 정말로 대한민국 근대사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콩나물시루와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있었습니다.
70명에 육박하는 친구들과 피터지게 경쟁하며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가난하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정치 지도자들의 속임수에 빠져 사당오락의 각오로 공부하던 그 시기가 선명합니다.
지금은 한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있는 우울함과 가난함이 있지만 80년대가 되면 한 가정에 한 대의 자가용을 굴리고, 소위 말하는 100억불 수출을 달성하게 되는 날, 우리 대한민국은 시인 타고르가 말한 그대로 동방의 빛이 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에 세뇌되어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던 시기가 모든 베이비부머들에게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80년대가 되고, 또 실질적으로 100억불의 수출을 달성하고, 경우에 따라 한 가정에 자가용을 굴리는 일들이 현실로 벌어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굴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모두가 어우러져서 잘 살고 공생하는 일은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문열 작가가 본인의 소설을 근래 썼다면 제목 명을 이렇게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할 것이라는 예측을 설교자인 저는 해 보았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이 문장은 아마도 숙명론적인 담론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십시다.
정말로 아름다운 국가와 사회는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 됩니다.
꿈틀리 인생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오연호 선생이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책에서 세계에서 행복지수 1위에 올라 있는 덴마크 방문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나라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권 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 교체이다. 덜 행복한 사회를 더 행복한 사회로 교체하는 일이다. 10%만 승자가 되는 사회를 90%가 승자가 되는 사회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려면 이 역동이 계속해서 꿈틀거려야 한다.”(pp,15-16)
읽다가 이런 소회가 밀려왔습니다.
힘은 들겠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 가능성에 손들어주기.
오늘 왜 설교를 시작하면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없다.’ 에 대하여 저울질했을까? 궁금해 하는 교우들이 있을 줄 압니다.
오늘 본문 해석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1절은 갈라디아서 안에는 물론 우리들이 익숙하게 암송하고 되새겨 보는 성서 구절 중에 하나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구절 중에 목회자인 저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새김질하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물론 이 구절은 이제 말씀을 드리겠지만 지금까지 갈라디아서 강해를 연구하며 쉴 새 없이 강조했고 지적했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도를 먼저 깨달았던 자들이 율법의 굴레로 회귀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명 구절로 정평이 나 있는 요절입니다.
본문과 연관하여 해석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가서 우상 숭배에 찌들려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언함으로 진리의 영이신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구원의 사람들로 인도하였음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그리고 관련되어 있는 바울 서신을 통하여 공부했습니다.
그 중에 이 내용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13-14장까지의 기록을 통해 감동적으로 배우고 느꼈습니다.
그 중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유대 율법은 그들의 정신과 자존감을 유지해 주는 젖줄 같은 도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젖줄을 끊고 예수의 복음으로 회귀한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헬라적인 문화와 정신세계 그리고 다신론적인 패러다임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의 도를 통하여 일어난 혁명과도 같은 회심은 그들은 이제는 더 이상 거짓 진리에 붙들리지 않고 오직 예수로만 살겠다는 일사각오의 사건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결의에 찬 회심을 경험한 자들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계속 살폈지만 그렇게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결별했던 율법(할례)을 다시 추구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로 본문 2-4절을 다시 음미해 보십시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탄식하고 또 탄식할 만한 기막힌 일이 벌어진 내용을 두고 바울은 조금은 과격한 어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⓵ 할례를 다시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⓶ 율법의 전체 의무를 다시 짊어져야 한다.
이렇게 고지한 바울은 결정타를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배교자들을 향하여 날립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 대목을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이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톰 라이트 교수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메시아에게서 끊어집니다.”
이렇게 격정적인 감정을 토로한 바울은 오늘 본문 끝 부분인 5-6절에서 이렇게 마무리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무엇을 결론으로 바울이 선포했습니까?
믿음 유용, 할례 무 효력을 재차 강조합니다.
믿음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십자가의 도를 인정하는 것이며, 할례를 받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고 율법으로 다시 회귀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기막힌 현상을 이렇게 독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끊어졌고,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저는 지금까지 갈라디아서에 국한하여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이제는 본문이 주는 교훈에 대한 외연을 조금 더 확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은혜의 확대성은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 이미 경험한 은혜의 자리에서 추락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해석하는 학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난해 구절을 하나 끄집어내겠습니다.
히브리서 6:4-5절의 말씀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구절에 대하여 전통적인 학자들의 해석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여 구원을 받은 자가 다시 타락하여 범죄의 자리로 돌아가면 다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온 구절입니다.
정말로 그럴까?
설교자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6:4-5절은 문자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설교자가 선포한 내용이 아니라 목회를 하다 보니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여 배교한 사람들보다, 이미 그 은혜를 알았던 자들이 그 은혜를 저버리고 타락했을 때의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메타포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롱 교수는 자신의 히브리서 주석서인 현대성서주석에서 6:4-5절과 연관하여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떨어진 자의 회복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시험하는 말이 아니라, 히브리서 설교자 자신이 목회 경험을 통해 실질적으로 얻은 연륜에서 나온 말이라 하겠다.”(P,147)
토마스 롱 교수의 말을 저 역시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나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구원하지 못할 존재는 그 어떤 영역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해 낼 수 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과 십자가의 도를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1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은혜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정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도가 타락을 거듭해도 다시 그를 견인하여 구원의 반열에 서게 한다는 교리를 의지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설교자인 제가 역설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위한 대 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필드에서 추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역설에 부합하는 대단히 중요한 성경적 내용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다시 우리는 1절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말을 풀면 이렇게 쉽게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매달리신 십자가의 도를 붙들고 다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복음에 현혹되지 말고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은혜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날개가 없는 것 같은 추락을 경험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강력한 경고를 남긴 것은 충분히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1장의 추억을 돌아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6-8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면 추락합니다.
어떤 추락입니까?
날개 없는 추락입니다.
이재철 목사께서 인간의 일생이라는 책에서 다윗이 ‘에덴’이라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영역에서 거하다가 ‘아단’이라는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는 영역으로 끝없이 추락한 역사의 내용을 너무 기막힌 분석으로 기록한 글을 십 수 년 전에 읽었는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저 역시 목회의 현장에서 이 권고를 나를 쳐서 복종하는 가늠자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목사께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무엘하 11-12장에 걸친 사건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⓵ 죄의 대담성 (사무엘하 11:3-4절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⓶ 죄의 결실성 (사무엘하 11:4-5절입니다.)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⓷ 죄의 확산성 (사무엘하 11:14-15절입니다.)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⓸ 죄의 둔감성 (사무엘하 11:26-27절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⓹ 죄의 후유성 (사무엘하 12:9-12절입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왜 제가 이재철 목사께서 이미 분석한 5가지의 내용을 교우들에게 이토록 자세히 설명했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 때문입니다.
‘에덴’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우아한 기쁨’이라는 하나님의 지배하심과 돌보심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에덴’이라는 히브리어 명사가 ‘아단’이라는 동사가 되면 ‘주색잡기를 하다.’ ‘패륜적인 행위를 한다.’는 뜻으로 바뀝니다.
다시 말해 ‘에덴’의 자리에서 ‘아단’의 자리로 이탈한 다윗은 날개 없는 추락의 추락을 경험했음을 교우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눈치를 채셨습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거하고 있습니까?
에덴입니까? 아니면 아단입니까?
결론)
저는 이제 8월이면 출간 될 종의 세 번째 책에 수록된 한 면을 교우들에게 소개하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나의 중심에 무엇을 두느냐에 따라 목표는 달라졌을 것이다. 나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었다고 여러 번 입으로 뱉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하나님을 상수가 아닌 변수로 여기며 살아온 것이었다. 부질없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에 천착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마른 풀이 아니라 굵고 뿌리 깊은 나무로 서 있었을 것이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당당하게 서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중심 되어 생각하고, 거기서 얻어진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매일의 총합이 내 인생이 되었어야 했다. 그렇게 살았더라면, 그 과정들은 흔히 말하는 쓰디쓴 인생이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 같은 인생이었을 것이다.” (2017, 12,31. 편지에서)
하나님을 상수로 두지 않고 변수로 여기며 살아왔던 나날들에 대한 회환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남김을 생각했을까, 본질적인 것에 천착했다면 지금의 나는 마른 풀이 아니라 굵고 뿌리 깊은 나무로 서 있었을 것이라는 그의 쓰라린 후회가 어찌 그만의 고백일까 싶었습니다. 기실, 오늘 나와 당신은 지금 고인이 남긴 유언처럼 이 비수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현재진행의 형태로 버젓이 무시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를 반추하며 부끄러웠습니다.
“부질없는 목표에 매달렸던 삶은 오늘을 누리지 못하게 했다. 비록 내 몸과 마음은 곤고하지만 지금부터 남은 날만큼이라도 하나님이 중심 되고, 거기서 얻어진 새로운 목표를 향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위와 같은 날짜의 글)
장엄하고 웅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기막힌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재삼 곱씹으니 이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오늘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본질적인 천착’에 달려 있다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던 주님께서 서 집사가 입성하는 날, 분명 그 자리에서 일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너른 품으로 그를 안아주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정수야, 애썼다.”
오늘 주일은 더 더욱 그가 보고 싶어집니다. 그 한 사람이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고 떠났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받는 위로가 이렇게 클 줄 정말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의 여행이 다 끝나는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두고 살아가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길 말고는 내가 영적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연약해서 내가 어떤 경우, 추락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변수가 아닌 상수로 알고 그 분의 중심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바로 이 믿음의 도구가 여러분을 다시 추락하는 그곳에서 다시 용솟음치게 하는 날개로 작용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떤 종교인은 추락할 때 날개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도에 붙들린 성도는 추락할 때에도 그것이 날개가 되어준다는 것을.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는 후자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