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어머니 같은 하나님2024-02-27 11:00
작성자 Level 10

2019년 7월 7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본문이사야 49:14-17

제목어머니 같은 하나님

 

오늘은 노래를 한 곡 듣고 설교를 이어가겠습니다.

 

(장사익 선생의 꽃구경’)

 

지난 번 친구 목사들이 어버이주일에 이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마침 친구 목사 교회에 처음 나온 한 성도가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이 교회는 눈물샘 폭발시키는 교회냐고 한 소리를 하고 나갔다는 전언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단어 중에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단어를 하나 뽑으라면 저는 어머니라는 단어를 뽑겠습니다.

지난달에 알쓸신잡에 출연하여 꽤 유명세를 탄 소설가 김영하의 단편인 오직 두 사람을 읽었습니다.

그 단편 안에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글이 나오는데 읽다가 여러 가지의 소회가 밀려왔던 생생한 기억이 있습니다.

아들 성민이를 마트에 장보러 갔다가 잃어버립니다.

이후 성민 엄마 미라는 유괴된 아들로 인해 미쳐버리는 과정을 작가가 극단의 리얼리티 감각으로 그려냅니다.

그러다가 유괴범이 양육을 포기하고 보낸 끝에 어떻게어떻게 해서 돌아온 아들 성민은 11년 동안의 괴리감으로 인해 전적인 이방인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부모를 만납니다.

문제는 만난 이후가 더 절망이었다는 점입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모호함이 그 가정을 더 비참하게 합니다.

작가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된 아픔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 역시 작품 안에서 타인에 의한 가족 붕괴라는 절망이 얼마나 엄청난 괴물도 작용하는지를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공감했기에 이 소설을 아프게 읽었던 아련함이 이제 독서를 마친지 한 달여 정도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독서의 평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왜 항상 자식에 대한 아픔이라는 명제가 나오면 언제나 더 큰 아픔의 대명사는 엄마라는 존재일까에 대한 소회가 저에게는 여지없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다가 제 책에서 소개한 박경리 선생이 소개한 소설가 박범신의 일화가 또 가슴 뭉클함으로 다가왔습니다.

히말라야에서/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어머니!/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아아/저게 토종이구나/(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p,96)

저는 오늘 어머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유다를 향하여 던진 위로의 메시지가 이렇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본문은 소위 말하는 제 이사야의 메시지입니다.

제 이사야는 주전 8세기에 아하스 왕 치세부터 히스기야의 치세까지의 남 유다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기에 거의 대부분이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후 40장부터 55장까지는 제 이사야가 외친대로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뒤에 바벨론으로 끌려간 비참한 상태의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유다가 회복될 것임을 외친 메시자가 주를 이루고 있기에 메시지 자체가 대단히 희망적입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유다의 포로기가 끝나가는 시기를 역사적인 기본 틀로 하고 있는 제 이사야의 본문 메시지는 대단히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많은 포로에 끌려간 유다 백성들이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에게 예언한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를 잊거나 버리셨다고.

이런 자탄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제 이사야가 이렇게 확언에 찬 위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여기에 기록된 여인은 해산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을 갖고 있는 일체의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어머니이거나 어머니가 될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모성 본능을 갖고 있는 여성이라면 결코 망각하지 않는 본능적인 결의가 하나 있습니다.

자식을 잊지 않는다는 본능입니다.

15-16절에 연속적으로 세 번에 걸쳐 기록한 히브리어 솨카흐는 본문에는 잊는다.’는 표현으로 번역되었지만 또 다른 의미로 방치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어떤 어머니가 자식을 방치합니까?

만에 하나 자식을 방치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정신병자이든사고로 인해 자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된 인식의 뇌구조에 변화가 생긴 괴물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제 이사야가 어느 정도로 자식을 잊지 않기 위해 어미가 노력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름을 손바닥에 새긴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무슨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까?

이렇게 선포한 이사야는 본문 마지막 절에서 위로의 메시지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쐐기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무슨 말입니까?

결국 자녀들을 이기게 하신다는 마침표를 찍은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합니까?

본문의 문자적 맥락으로 말씀드리면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적인 은혜와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교훈입니다.

안상홍 증인회의 속 모습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단이 너무나 어머니 하나님을 본인들의 레떼르로 강력하게 각인을 시켜 놓아 말하기조차 이제는 조심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부성을 갖고 주권자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항상 품어주시는 어머니의 모성을 갖고 계신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십니다.

100주년 기념 교회 사역을 아름답게 은퇴를 하신 이재철 목사께서 저술하신 새신자반을 보면 이 목사께서 모성적인 본능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성경 구절을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편 121: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자식을 위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존재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이사야 66:13절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어머니의 위로는 치료의 광선입니다.

마태복음 23:37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들이 곁길로 가지 않도록 하시는 보호하시는 사랑입니다.

오늘 예배에 나오신 세인 지체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형제자매 여러분!

요한복음 3:16절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더불어 그 사랑의 결과물로 주님이 어머니처럼 행하셨던 위대한 결단이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제가 아는 어떤 어머니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과년하여 결혼 적령기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딸의 남자 친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해서 딸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서로 소통의 끈이 없어지자 갈등이 극에 달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딸에게 던지는 마지막 공격의 멘트는 우리나라 엄마들 모두가 공히 하나입니다.

만에 하나 네가 그놈하고 결혼하면 나는 확 죽어버릴 거야!”

많은 딸들은 이제 이런 협박에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저는 그래도 아날로그 세대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뭉클함이 있습니다.

딸의 행복을 비는 정도가 이 세상에서 어머니보다 큰 존재가 과연 누가 있느냐는 소회 말입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큰 감동의 여운을 드리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엄포용이 아니라 진짜로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죽어버린 존재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여러분을 초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손바닥위에 새겨 놓으시고 우리를 잊지 않고 돌보십니다.

오늘 그분을 주군으로 인정하는 모든 분들은 그 분이 던지시는 위로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이 은혜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읽고 기도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