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성서 일과 묵상 왜 두 번이었지?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126편, 예레미야 29:24-32, 마가복음 8:22-26, 시편 34:1-8, 욥기 42:7-9 꽃물 (말씀 새기기) 마가복음 8:22-26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가십 형태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영빨(?)이 약해지신 것일까? 단 한 번의 치유 사역만 하면 시각장애인이 나을 수 있는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능력의 주님이신데 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에 걸친 사역을 행한 뒤에야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일까? 학자나 설교자에 따라 본문은 너무 다양한 해석이 있어 어떤 해석을 선택해야 할 지 즐거운(?) 고민을 하게 한다. 그러기에 설교자의 신학적 기초에 따라 선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임을 밝히면서 나 또한 오늘 성서 일과를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신앙의 성숙은 점진적 성숙이 가장 안전하다. 기독교 신앙의 매직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긍정적 사고방식이라는 심리술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시장판에서 벌어지는 뻥튀기 장사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지난한 훈련의 과정이 병행되는 장거리 경주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신학자가 말한 대로 오늘 성서 일과에 피력된 주님의 치유 사역은 점진적 승리를 보여준 의도된 사역이라는 주장에 가슴이 닿는다. 빨리 탄 장작인 빨리 식는다는 말처럼 꾸준한 변화와 성숙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임에 틀림없다. 두레박 (질문) 서둘러거나 성급하게 어떤 성과를 보려는 얍삽함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느려도 우직하게 성장하게 하옵소서. 조급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성급하게 조각된 작품은 질이 떨어진다. 시간이 필요해도 세밀하게 만들어진 작품의 가치가 높은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져 가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존귀하신 하나님, 우리 세인 교회가 조잡한 교회가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 성실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