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3일 수요일 성서일과 묵상 조아림, 엎드림, 겸손, 섬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87편, 이사야 66:18-23, 마태복음 8:1-13, 시편 130편, 창세기 45:16-28 꽃물 (말씀 새기기) 창세기 45:16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마중물 (말씀 묵상) 이 구절을 읽다가 요셉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온 것이 바로와 신하들에게 뭐 그리 큰 기쁨의 소식이었겠나! 이방인 출신이 지금 애굽이라는 거대 제국의 총리 자리를 꿰차고 있는데, 도리어 애굽인들에게는 자리 하나를 빼앗긴 박탈감으로 인해 요셉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 그냥 평상적인 분위기였을 게다. 그런데 그렇게 요주의 인물이고, 별로 달갑지 않은 요셉의 형들까지 애굽에 와 있는 것이 기뻐할 일인가를 묻는다면 흔쾌히 ‘예스’ 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상황이다. 하지만 창세기 기자는 말한다. ‘기뻐했다.’고. 바로는 정치 공학적으로 그럴 수 있다. 자기가 심은 사람이니 왜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신하들이 기뻐했다는 보고는 의외다. 정말일까? 그러다가 이런 감동이 내게 임했다. 요셉의 정치적인 대안 제시로 인한 애굽인들이 위기를 겪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가 이어졌기에 기뻐했다는 해석이 아니라, 이 기쁨은 분명 요셉이 총리를 임명받은 이후, 그가 보여준 인격 때문이었으리라는 소회가 내게 강하게 밀려왔다. 그렇지 않을까? 군림한 요셉이 아닌, 겸손한 요셉의 인격이 애굽의 동료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유는 아니었을까 싶다. 정치인들이 보여야 할 태도는 군림이 아닌 조아림이요, 엎드림이요, 겸손이요, 섬김이다. 하지만 작금 정치인들을 보면 내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자체가 대단히 부끄럽고 치욕적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너무 많아졌다. 신하들이 기뻐했다는 성서일과에 속해 있는 이 구절이 절절하게 다가온 이유다.
두레박 (질문) 인격적인 목사로 살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복음의 능력을 믿고, 그 복음의 능력대로 온전히 살아가는 믿음을 주옵소서. 말과 삶이 유리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섬김의 자리를 능동적으로 찾아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수산물 공포가 턱 앞에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무너지고 있는 어민들, 그리고 관계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자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습니다. 주님, 이 나라를 살려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