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 주일 성서일과 묵상 잘 살자. 오늘의 성서일과 호세아 5:15-6:6, 시편 50:7-15, 로마서 4:13-25, 마태복음 9:9-13,18-26 꽃물 (말씀 새기기)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마중물 (말씀 묵상) 호세아를 통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는 대단히 선명하다. ‘앎’이 아니라 ‘삶’이라는 메시지다. 아는 것이 왜 중요하지 않겠나. 하지만 호세아를 통해 비쳐주신 영적 교훈은 분명히 ‘삶’이다. ‘삶’이 전제되지 않는 ‘앎’은 오히려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김수환 추기경이 ‘머리에게 심장으로 내려오는 데 50년이 걸렸다.’고 말한 대로 삶은 쉽지 않다. 녹록하지 않다. 멋스럽고 폼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눈물이 있어야 하고, 엎드림이 있어야 하며, 자기 포기와 자기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에 그렇다. 야훼께서 왜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호세아 예언자 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의 형식적, 요식적 종교 행위나 겉치레와 같은 제사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시인하고 있지만 언제나 마음이 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적 위선에 분노하셨기 때문이다. ‘헤세드’ 즉 ‘인애’라고는 번역했지만 실상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가 ‘헤세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체의 삶과 동일한 단어가 ‘헤세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충분히 공감되는 대목이다. ‘제사’ 드림으로 모든 종교적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던지는 경종이기도 하다. 목사라는 직으로 평생을 달려왔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걷고 뛰었다. 돌이키면서 반성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었다. 앞으로 남은 여정도 그럴 것 같다. 그리스도 예수처럼 살아가는 ‘삶’, 참 쉽지 않다. 두레박 (질문) ‘인애’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되지도 않을 완벽하리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고 그냥 실수하지 않는 흉내라도 내려는 의지가 내게 있을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삶이 동반된 앎을 추구하게 하시고 이 지난한 여정에서 실패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시오. 나비물 (말씀의 실천)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의 역할도 해야 하겠지만, 가끔은 같이 비를 맞아주는 삶도 살게 해 주십시오.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항암 치료 중에 있는 딸을 안아 주십시오. 힘들지 않도록 곁에 있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