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일(화요일) 묵상 이러니까 믿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89:5-37, 예레미야 1:4-10, 사도행전 8:4-13 꽃물 (말씀 새기기) 시편 89:34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마중물 (말씀 묵상) 하비 콕스가 말했던 것이 기억에 있다. “세속화의 필수적 측면 중에 하나는 모든 인간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것이다.”(하비 콕스, “세속도시”, 문예출판사, 76.) 현대인들은 가치의 절대화에 대한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해서 획일화에 대해 담대히 반대하고 그 동안 전통적으로 절대적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들의 언어로 세뇌되어 왔던 일체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다. 나는 종교라는 필드에서 세속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그토록 강하게 가치의 절대화를 부인하고 거부하려는 지에 대해 일견 이해한다. 이유는 가치의 절대화를 순수한 믿음의 내용으로 정립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교리적인 철옹성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던 일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서적 동의는 여기까지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 또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주군의 신실함’ 이것을 상대적이라고 말하면 목사인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나와 같은 종교적인 마인드가 없는 자들에게 내 생각에 동의하라고 압박하는 그런 치졸함을 요구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89:34절을 상대화하는 것은 수용 불가다. 시인의 토로한 내용 그 자체가 내 삶의 영역에서 한 번도 예외인 적이 없기에 나는 주군의 말씀을 신앙적 가치로 절대화하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혹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라니까! 그러면 나는 그냥 웃는다. 종교에서 믿음의 대상에 대한 경전적인 동의와 수용이 없는 자에게 그 종교를 믿으라는 말은 소가 웃을 일이가 때문이다. 더불어 한 가지만 더, 나는 경전적인 신뢰를 내 삶의 현장에서 체휼한다. 그걸 감정적인 것이라고 호도하면 뭐, 할 수 없다. 왜? 신앙의 객체가 신앙의 주체에 대해 감정적인 동의가 없다는 게 제정신인가를 되묻고 싶기 때문이다. 신학교 시절, 나는 이렇게 배웠다. 건강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지정의가 균형 잡힌 지성적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조직신학 선생님들에게 배웠다.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시인의 입을 통해 다윗 왕조에 대한 견고함을 설파하신 주군의 이 ‘다바르’가 대단히 은혜롭고 감사하게도 나는 믿어진다. 감정으로만?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시인이 노래한 하나님의 이 신실하심이 지정의로 인격 속에서 배아 되어 고백된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다!” 두레박 (질문) 내가 신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에 대해 신뢰하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들이 감정의 폭이 아닌 지정의의 인격을 통해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나비물 (말씀의 실천) 신실하신 하나님께 나도 신실해 보자. 최선을 다해, 부족할 때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엎드림에 소홀하지 말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네 번째 졸저가 최종 교정에 들어갔습니다. 책 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동연 출판사 직원들을 강복해 주시고, 선한 영향력을 제시할 수 있는 양서(良書)가 되게 해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