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32:1-6 제목: 하나님을 만들지 말라 “자기의 창문을 통해서 응시하는 무신론자가 자기가 만든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힌 신앙인보다 하나님에게 더 접근해 있다.”(폴 쉴링, “무신론 시대의 하나님”, 현대 사상사,p,16.) 유대인 출신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갈파한 이 문장은 신학대학교 학부 시절에 읽었던 최고의 촌철살인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신학교 시절, 목사로 사역할 때 어떻게 목양의 현장에서 교회를 세워 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적어도 필자에게는 알려준 내 인생의 한 마디였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제시한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부버의 일침대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낸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혀 인간 스스로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주(主)이신 하나님을 변질시킨 가장 대표적인 성경 본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성산인 시내산에 올라간 뒤 40일 동안 두문불출하자, 성질 급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무리들은 아론에게 모세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음을 고지합니다. 이윽고 그들은 제사장 아론에게 이집트에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여 낸 신을 만들어 낼 것을 종용하고 압박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의 세력에게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론은 대중의 물리력에 굴복하여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여인들의 금귀고리들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금송아지가 만들어지자 아론을 압박했던 무리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만들어진 금송아지를 이집트에서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의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된 아론은 여호와로 지칭된 금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 제사를 마치고 난 무리들은 여호와의 절일에 먹고 마시며 뛰어 놀았다고 출애굽기 32:6절은 보고합니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 놀더라”(출애굽기 32:6 개역개정판) 6절을 신학적인 해석이 없이 그냥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이 사건 기사의 정황을 놓고 볼 때 금송아지의 형상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행한 행위가 번제(올라)요, 화목제(제바-쉘라밈)였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형상은 송아지의 형상이기는 했지만, 그 형상의 상징은 고대 근동의 이상한 종류의 잡신(gods)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신(god)이라는 분명한 인식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대노하셔서 시내산에서 하산하게 한 모세를 통하여 두 돌 판으로 그 금송아지 형상을 깨뜨리게 하셨고, 후에 이 사건을 회상하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인 신명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 형상의 파괴는 혹독하리만큼 무자비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신명기 9:21 개역개정판) 하나님이 너무 민감하셨던 것은 아닌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성서신학적인 주석을 전제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절에 기록된 ‘송아지’로 번역된 ‘에겔’은 고대 근동에서 우회적으로 ‘애송이’라는 경멸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동시에 소는 고대의 신(神)들이 밟는 받침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금송아지는 아주 하찮고, 보잘 것이 없는 애송이 같이 짓밟아도 되는 존재라는 고의적 폄훼가 이 단어 안에 내포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단어 ‘뛰 놀더라’ 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헤크’ 라는 동사는 고대 근동의 종교적인 제의에서 성적인 난교와 잔치를 벌일 때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허울 좋은 종교적인 쇼를 벌인 뒤에 시내산 난장(亂場)판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그 동안 하나님 때문에 억눌려 있었던 육체적인 쾌락을 마음껏 누리는 카니발을 열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었을까? 그 지난(持難)했고, 이론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하여 시내산까지 도착했던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가 어떻게 이렇게 한 방에 변질될 수 있었던 걸까? 그 답을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 하나님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존재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간섭하지 말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만 주는 하나님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 시내산 사건입니다. 우리들이 적당한 제사와 제물을 드릴 테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우리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섭하거나 끼어들지 말라고 하나님께 선전포고를 한 사건이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해졌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캐나다 뉴 라이프 커뮤니티 교회를 섬기는 마크 뷰캐넌이 쓴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안전하다.’(한국어판: 열렬함)에서 언급한 글을 읽다가 전율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위험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p,46) 오늘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신자들에게서 너무 많이 느끼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 안전한 하나님으로 남아 주기를 원하는 아픔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한 복판에 들어오면 부담스러워합니다.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안전한 거리에서 나를 돌보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손 사레를 치는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비극이요, 참극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뉴욕 리디머 교회를 이끌었던 팀 켈러의 경고가 크게 와 닿는 오늘입니다. “어떤 문화든 하나님을 몰아내다시피 하면, 사람은 그 빈 자리를 섹스와 돈과 정치가 채우게 마련이다.”(팀 켈러, “내가 만든 신”, 두란노, p,169.) 기막힌 통찰입니다. 바라기는 한국교회가 나에게 편안한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만들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