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사기 11:34-40 제목 : 똑바로 배워야 합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기고만장한 마음으로 미스바 자기 집에 개선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자기를 제일 먼저 환영해 주는 것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오호 통재라! 이게 웬 일입니까?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입다를 환영한 자는 다름 아닌 그의 무남독려 외딸이었습니다. 입다는 순간, 사색(死色)이 되었고 옷을 찢으며 절망합니다. 자기 딸을 인신 제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딸 역시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버지에게 서원한 대로 하라고 순종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 걸었습니다. 두 달 여의 말미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 즉은 처녀로 죽게 된 나를 위하여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서 애곡하는 기간을 가진 뒤에 인신 제물로 바쳐지겠다는 비장한 효심(?)을 비친 것입니다. 결국 입다에게 허락을 받은 입다의 딸은 말 한 대로 산에 올라가 애곡을 한 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이 본문 스토리입니다. 어떻습니까? 본문의 줄거리를 듣고 난 뒤의 소회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밀려왔습니까? 두 가지의 반응으로 예상합니다. 첫째, 이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스토리를 믿으라는 것인가? 둘째, 입다와 그의 딸이 슬픔을 머금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킨 것은 대단한 믿음의 행위라는 산파극적인 감동? 여하튼 둘 다이든 아니면 전자이든 후자이든 필자에게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회이며 앎입니다. 레위기 17-26장을 가리켜 소위 ‘성결법전’(Holiness Code)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룩한 삶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는 강령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삶을 지시하는 한 복판의 강령 중에 바로 인신 제물 금지법이 있습니다. 레위기 18:2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렇다면 사사기 11:30-31절에서 입다가 분명히 여호와 이름을 거론하며 여호와께 서원했지만 그의 딸을 인신 제물로 바친 행위와 아버지의 전혀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앙의 행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를 제물로 바친 입다의 딸의 행위에 대하여 필자는 이렇게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못 배운 것에 대한 비극이라고. 사사 시대는 하나님이 무시당하던 시대였고, 수없이 많은 왜곡의 내용들이 마치 하나님의 진리인양 둔갑되던 시대였기에 이런 참담한 일이 버젓이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입다와 그의 딸의 병행된 행위를 통해 무엇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요? ※ 똑바로 잘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주해하고 있는 구약신학자들의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Kle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일은 아버지의 무지함(ignorance)과 딸의 순진함(innocence)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McCann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암몬 사람과 싸워 이기고 승리한 입다는 암몬 사람처럼 인간 번제를 밀곰에게 바치고 있다.” 기막힌 주석적 통찰들입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유명해졌지만 아직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 개인 레슨을 하면서 생계유지를 해야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모차르트가 천재 음악가라는 소문이 자자했기에 많은 피아노를 전공하려는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개인 레슨을 요청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개인 레슨비를 설정할 때 초보자에게는 레슨비를 저렴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반면 어느 정도 피아노를 치는 자들은 레슨비가 상대적으로 비쌌습니다. 불만을 품은 전공자가 모차르트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 같은 기전공자들이 초보자들보다 더 많은 돈을 내야 합니까?” 그 때 모차르트가 반응한 말은 피아노를 전공하는 자들에게는 불문율과 같은 명언으로 남아 있습니다. “초보자들보다 잘못 배운 자들을 바로 잡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상당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들었던 풍월로 적당히 나를 포장시키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했어도 몇 십 년을 했는데 내 생각을 꺾을 것 같냐고 반문하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배는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 이 한 번의 예배를 통해 대박 인생을 터트릴 목적으로 예배를 보는 자가 있다면 당신은 현대판 그모스와 밀곰에게 인신 제물을 바치는 우상 숭배자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내가 그런 자라면 처음부터 다시 신앙의 초보를 걸으십시오. 잘못 배운 왕신자보다 다시 올바른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기 위해 첫 걸음을 띠는 초보 신자가 훨씬 낫습니다. Merry Christmas and Graceful New yea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