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야웨, 야웨 하지 말라 본문: 사사기 11:4-11 목회를 하면서 현장에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목회는 마라톤이라는 배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목회 현장은 언제나 ‘ing’의 과정이지 ‘the end’의 결론이 아니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목사는 언제나 한 가지의 사역을 행할 때마다 겸손하게 사역에 임해야지 기고만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곤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고만장했던 한 부류가 그 기고만장했던 교만 때문에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일을 당했던 한 기사를 보고합니다. 길르앗에서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복형제들에게 철저하게 버림을 당해 돕으로 쫓겨나 막 살던 입다라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랜덤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를 헌신짝처럼 버렸던 길르앗에서 신분적으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장로들이 그를 방문합니다. 이유는 길르앗이 블레셋과 암몬의 침입으로 인해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 자신들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고 막 살았기에 용사로 성장한 입다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고 두 나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이 전쟁의 수장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6절) 그러나 그들에게 버림을 받은 입다가 그 청을 순순히 받을 리 만무입니다. 억하심정으로도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7) 예상을 하였던 바 싸늘하게 거절하는 입다에게 길르앗 장로들은 플랜 B를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본문 6절에서는 장관의 ‘자리’에 앉혀 주겠다던 그들이 8절에서는 ‘머리’가 되게 해 주겠다고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주석이 필요합니다. 6절에서 길르앗 장로들에 의해서 제안된 ‘장관’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찐’은 군사령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에 반해 8절에서 재차 제안된 ‘머리’라는 히브리어 단어 ‘로쉬’를 스위스 루에슐리콘 침례교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교수를 역임한 트렌트 버틀러 박사는 그의 사사기 주석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쉬는 가족들의 우두머리를 표현할 때 사용되며 또한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를 표현할 때도 종종 사용된다.(민 1:16,신 1;15, 왕상 8:1, 왕하 5:2)”고 주석했습니다. 더불어 계속해서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입다는 사사기 11:4-11절에서 머리가 되라고 부름을 받는다. 이는 이 경우에는 단순히 군사적 리더가 되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아마도 통치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어떻습니까? 인생 역전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세속적 관점으로 볼 때 입다에게 인생 역전이라는 대박이 임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입니다. 조금만 더 본문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입장 정리가 된 이후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의 요청대로 블레셋과 암몬 연합군과의 전투에 리더로 나서게 됨을 사사기 12:7절 이하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대목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문 9-11절에 그 동안 사라졌던 단어 ‘여호와’ 라는 단어가 연이어 3번에 걸쳐 등장합니다.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에게 만에 하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암몬을 나에게 넘겨주시면(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암몬을 물리치게 해주신다면) 내가 과연 너희들의 통치자가 되는 것을 인정하겠느냐는 물음을 던집니다.(9절) 그러자 초록이 동색이라고 길르앗 장로들은 맞장구를 칩니다. 여호와께서 이 약속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10절) 그러자 본문 마지막 11절에서 보고하고 있는 입다의 행위는 가관입니다. 머리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입다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통보합니다.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11절) 설교자이자 해석자인 필자는 이 구절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해석합니다. ‘아뢰니라’라고 번역된 단어 ‘다바르’는 대체적으로 ‘말한다.’는 뜻이 맞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명령하다.’ ‘협박하다’라는 의미로 갖고 있는 단어로도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길르앗 장로들과 입다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일체의 일과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사사기 11:1-8절까지 본문에서 여호와는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조금 과격하게 표현한다면 여호와는 무시되었습니다. ‘다바르’는 통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9-11절에 사용된 야웨 하나님은 이 두 부류들이 임의로 자기들의 일을 다 맘대로 정한 뒤에 마지못해 구색 맞추기로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다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는 매우 유감천만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나의 유익을 위해 야웨, 야웨 하지 마십시다. 왜냐하면 야웨 하나님은 나의 목적이어야지 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샬롬의 은혜가 머물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