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사기 9:1-6
제목 : 싸워야 하는 것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전과도 같은 책인 ‘돈, 섹스, 권력’(두란노 서원 간)에서 영성신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을 ‘영적’이라고 해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시사입니다. 리디머 신학교의 폴 트립 교수도 본인의 수작인 ‘돈과 섹스’(아바 서원 간)에서 “성경은 돈 문제로 관련해서 편안한 중립성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고, 월터 브루그만도 ‘하나님 나라의 권력 투쟁’(CLC 간)에서 “권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기술공학의 노골적인 힘과 무자비하고 뻔뻔스러운 이데올로기의 압력을 포함하는 사회적 힘의 흐름을 말한다.”고 언급함으로서 돈과 권력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주군이신 예수께서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 26:52)고 말씀하신 장면입니다. 환언하자면 권력을 통한 폭력에 대하여 경고하신 것은 그만큼 권력에 대하여 곱지 않는 평가를 내리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는 사사기 9장은 시작부터 벌써 이 두 가지의 대상(돈과 권력)에 대하여 신명기사가에 의해서 아주 싸늘하게 기록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드온이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이름을 지어 줄 정도로 권력에 애착을 이어주고 싶어 했던 아비멜렉의 비극사를 엿보게 해 줍니다. 아비멜렉은 어떤 의미로 보면 당시 서자 출신의 설움을 당한 자였기에 항상 적자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고 있었던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던 자였습니다.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오브라와 세겜 사이에서 적지 않은 권력 투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오브라는 아비멜렉의 친가였고, 세겜은 외가였습니다. 이 두 지역 간의 묘한 긴장관계를 이용한 아비멜렉은 적자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외가 지역이었던 세겜 거민들을 선동하는 데 성공하여 권력 투쟁에서 승기를 잡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지역에 살고 있었던 거민들에게 우리들에게도 너무 익숙한 ‘경상민국, 혹은 전라민국’을 연상하게 하는 지역주의를 조장하여 세겜 지역에서 태어난 내가 정권을 잡아야 이 지역이 주류가 되지 않겠는가를 반문하는 천박한 포플리즘 정책에 성공합니다. 이로 인해 세겜 지역의 거민들은 아비멜렉에게 열광하였고, 그에서 바알우상에게 드렸던 오염된 물질까지 상납합니다. 아비멜렉은 그 물질로 세겜에 살고 있었던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삿 9:4) 즉 불량배, 깡패들을 고용하여 오브라에서 태어난 이복형제 70명의 살인을 교사하는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이후 아비멜렉은 왕이 되어 권력을 쟁취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이여! 그렇다면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반면교사 삼아야 할까요?
※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권력과 맘몬과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부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이렇게 죄를 정의했습니다.
“죄란 인간의 자아가 자신을 향해 굽어 있는 것이다. (homo incurvatus in se)”
그렇습니다. 동의합니다. 인간을 이타적인 삶의 형태가 아닌 극단의 이기성으로 몰고 가는 그래서 언제나 자아를 자신 안으로 굽어 있도록 종용하는 신앙의 치명적인 암세포는 권력욕과 맘몬이라는 영적 실체입니다. 마치 아비멜렉이 동시에 추구했던 것이 맘몬과 권력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하며, 성도를 성도답지 못하게 하고, 목사를 목사답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원흉이 돈과 권력이라는 사실은 아베멜렉의 사사시대나 신 사사시대를 방불 하는 오늘이나 이현령비현령이고, 도찐개찐입니다. 아비멜렉은 권력과 맘몬을 이용하여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권력과 물질은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그것이 선한 것입니다. 특별히 물질은 더 더욱. 내가 필요 이상으로 쇼핑에 몰두하는 것은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일 노동자로 묶여 단돈 1달러에 학대를 당하고 있는 제 3세계의 어린이들을 그 노동의 지옥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공범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마시는 커피는 커피를 생산하기 위한 힘없는 나라의 청소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내가 향락과 쾌락에 소비하는 물질은 물질적인 빈곤함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삶의 의지를 꺾는 돌멩이 던지는 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명품에 눈을 돌리는 것 자체가 우리들의 이웃들인 지구 반대편의 아프리카에서는 한 끼의 식량이 없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그냥 방치하는 방관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물질들과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우연히 읽은 책에서 시인 정현종 선생의 글귀를 읽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들이 영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들에서 물러서지 마십시다. 샬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