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순례자로 산다는 것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자기의 흔적과 만난다는 것, 그것은 참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가령 다리쉼도 할 겸 차도 마실 겸 우연히 들른 북카페에 진열된 책을 일람하던 중 내 이름자가 박힌 책과 만났을 때가 그러하다. 그럴 때면 카페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가 궁금해지고, 호감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 화면에 눈길을 주고 있는 지하철에서 책을 꺼내드는 사람이 있어 바라보니 그가 기적처럼 내 책을 펼쳐 들 때도 마찬가지이다. 말이라도 한번 건네볼까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망설이지만 쑥스러워서 그런 짓은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궁금해진다. ‘그는 지금 어느 문장을 읽고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짓는 표정에 예민해진다. 글쓰기를 유리병에 담아 파도에 띄워 보내는 편지에 빗대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 그 글이 어디를 향하는지, 누구에게 당도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글 쓰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 글이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그들이 정신적 둔감함에서 깨어나기를 소망한다. 주제넘은 소망일지 모르지만 그런 소망조차 품지 않는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다. 어떤 이들은 글을 피로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글에 공력을 들이고, 자기의 혼을 담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의 경우 그런 장엄한 말은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나는 왜 쓰는가? 써야 할 말이 넘치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쓰지 않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텅 빈 백지와 마주한다는 것, 아니 눈을 껌벅이며 입력을 기다리는 화면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편한 시간을 견디며 한 소식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익숙함의 세계에 갇힐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써야 할 글의 얼개를 다 정하고 글을 쓰는 이들도 있지만,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자기를 맡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의 경우는 후자이다. 물론 최초에 그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계기일 뿐, 처음 생각과 완전히 다른 곳에 당도할 때도 많다. 당혹스럽지는 않다. 글을 구상할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나 분명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지점을 발견했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다. 글쓰기의 선물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다시금 묻는다. “나는 왜 쓰는가?” 굳이 대답해야 한다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독교인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싶어서라고 말하고 싶다. 중뿔나게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을 먼저 설득하고, 할 수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길을 함께 가보고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글에 공감하든, 냉철하게 비판을 하든, 어떠한 형태로든 독자들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목사는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공부는 다 소용없다고,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다. 목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욕정에 휘둘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옛사람은 ‘인간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정신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그 핵심을 꼭 붙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핵심을 붙들기 위해서는 늘 인식에의 목마름을 품고 살아야 한다. 시대정신을 분별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위태롭게 허둥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삶의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도록 만드는 시대정신과 맞서기 위해서는 지향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사가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공부하지 않는 목사는 사람들을 오도하기 쉽다. 스스로 길을 잃은 목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강덕 목사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목회자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을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말하지만, 또 그 말이 은근한 자부심을 숨기기 위한 위장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는 학생정신에 충만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목사다운 목사이다. 눈 밝은 그가 내 책 열세 권을 읽고 서평을 적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의 허술하고 부실한 사유세계를 간파했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조금 안 후에 그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강덕 목사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일종의 전작주의자인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말리기 어렵다. 책 말미에 덧붙인 참고도서 목록만 봐도 얼마나 치열한 인식욕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인식욕이 아니다. 그는 참의 길을 맹렬하게 탐색하는 진리의 순례자이다. 그가 열어가는 인식의 세계를 통해 많은 이들이 낯설지만 황홀한 세상과 만나 현실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멋진 글벗과 만났다는 사실이 참 즐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