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회 사무총회 개회사 “악이 매력적인 이유는 악이 깃든 사람이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확고한 자기 신뢰가 흘러넘치듯 보이기 때문이라는 걸 반평생의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p,172) 재일동포 학자인 강상중 교수가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에서 피력한 내용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악의 유혹을 갈파하였기에 이런 부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너 자신만 믿어라. 자기 자신을 하나의 기업으로 여기라, 자신이라는 기업에 투자하고 갈고 닦아 글로벌 시장에 투사가 되라. 이와 같은 세뇌로 더욱 더 ‘개인화’를 밀어 붙이는 자본주의가 세상을 덮고 있으니 악이 번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같은 페이지) 목회를 하면서 현장 목회자로 30여 성상을 지내온 결과 죄의 변천도가 눈에 여실히 들어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60-70년대 죄는 일탈이었고, 신앙적이지 못한 일련의 행위들이었습니다. 1980- 90년대 죄의 목록은 정의롭지 못함이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죄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개인화라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종교다원주의의 세도가 강력한 후기 산업시대 즉 포스트-모너니즘의 시대는 누군가에 의한 강제, 압박, 통제, 그리고 획일화 하는 것을 못견뎌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함’ 을 누리는 것이 대세이고, 그 자유함을 방해하는 일체의 집단, 행위, 신념 등은 추방의 대상이며, 격리의 제일 순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종교 역시 이제 불편한 매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기독교 역시 예외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유함’ 은 모든 21세기를 살아가는 자들의 로망이요, 새로운 금송아지로 부상되었습니다. 헌데 이 자유함을 누리려면 대전제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화입니다. 자기중심주의, 철저한 이기주의를 전제한 나 외의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배타성이 바로 오늘의 신앙이자 신념으로 굳어지고 말았다는 점에서 그 심각함이 있습니다. 강상중 교수는 바로 이런 심각한 현상을 악이라고 정의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강 교수의 일침과 정의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심정을 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인 저는 이런 개인화, 철저한 이기주의를 전제로 한 자기중심주의가 악의 핵심임을 지적한 정치사회학자가 보는 시각을 뛰어 넘어 한 가지를 더 중요한 진단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입니다.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불편한 종교는 사멸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런 시대의 기상도가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종교가 가지고 있는 내적 영성으로 환원은 그래서 더 요구될 것이라는 역설의 예측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종교의 사멸 내지는 침체를 내나봅니다. 일견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저 역시 아프지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과학적인 예측과 진단을 전적으로 100% 수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 내면의 진공 상태는 과학과 물질과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질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과학적 유토피아의 기대감이 발전되면 발전될수록 인간이 경험하게 될 영적 빈곤함은 더욱 더 극에 달할 것이 자명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영적 빈곤함을 빌미로 악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부상할 시기인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지금은 영적 곤고함 그리고 악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더 종교적이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 개념과 용어로 설명하다보니 ‘종교적’ 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지만 더욱 더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익숙한 우리 기독교적인 용어로 다시 바꾸어 설명한다면 지극히 기독교적인 본질로 무장해야 한다는 말의 에두름일 것입니다. 한자 단어 중에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를 풀면 우리가 잘 아는 ‘오뚝이’입니다. 4 왕조 시절, 10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20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풍도’를 빗댄 단어입니다. 쓰러뜨려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던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전술했듯이 곧잘 오뚝이를 의미하는 단어의 대치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오뚝이가 왜 쓰러지지 않습니까? 무개의 중심이 아래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쪽에 있는 무게가 있다는 표현을 한자 단어로 ‘저력’(底力)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개척 10년차를 2018년에 맞이하게 됩니다. 아슬아슬한 시간들이 지난 9년 동안 우리 교회에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개척교회는 유리구슬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말 일 것입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도 깨지기 쉬운 개척교회로 시작한 우리 세인 교회는 지난 9년 동안 깨지지 않고 도리어 단단해졌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는가? 개척한 교회의 멤버가 좋아서였을까? 어느 한 부분의 주장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개척자의 수가 든든했기 때문인가? 역시 한 부분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긍정의 표를 한 표 정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세인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인교회가 世認교회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개척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밑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밑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부도옹 되시는 주군께서 우리를 지탱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세인교회는 어제도 세인교회로 설 수 있었고, 오늘은 세인교회로 서고 있으며, 내일은 세인 교회로 설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2018년, 개인화라는 새로운 바벨탑과 싸워야 하는 한 해를 달려야 합니다. 생각해 보며 아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이것을 믿습니다. 밑힘이 되셔서 우리 세인교회를 받쳐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주셔서 우리 세인교회가 2018년에는 더 아름다운 바른 부흥과 진정성이 있는 이타적 교회로 다시 서 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해서 이 밑힘을 근거로 세인교회가 또 한 번의 도약을 기약하며 꿈꾸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이 밑힘을 근거한 도약을 꿈꾸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한국독립교회 연합회 세인교회 제 10회 사무총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주후 2018년 1월 7일 세인교회 담임목사 이강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