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와 같이 본문: 사사기 4:23-24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한 명이 ‘엠마우스’ 라는 빈민 구호단체를 만들어 약한 자의 편에서 사랑을 실천한 아베 피에르 신부입니다. 그는 본인의 걸작인 ‘단순한 기쁨’에서 아주 의미 있는 말을 기록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p,92)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영적 기상도인 것 같습니다. 저는 신앙인들이 가져야 하는 상식 중에 이성을 무시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목회를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천박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베 피에르 신부의 이 촌철살인을 마음에 담아둔 이유는 신앙의 대전제는 하나님의 유무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나의 주군에 대한 100%의 신뢰라고 믿기 때문인데 피에르가 그것을 통쾌하게 고백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까? 상당히 많은 신학적 논쟁이나 토론의 거리들을 야기할 수 있는 테제이겠지만 필자는 그 분의 성실하심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본문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사사기 기자가 본문에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3가지의 일을 복기하고 있습니다. ① 가나안 왕 야빈을 굴복하게 하셨다. ②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갔다. ③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다. 같은 일처럼 보이는 세 가지의 일하심을 열거한 사사기 기자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분명히 이 세 가지의 일을 행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의미 파악은 사사기에 익숙한 웬만한 독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22절과 23절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 주는 단어 ‘이와 같이’ 입니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드보라 사사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이미 살폈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의 결과를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본문에 기록된 이와 같이’ 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 그대로 이와 같이 당신의 백성들이 승리하도록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공수표를 남발하는 인간들의 자화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당신의 성실하심을 토대로 그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제가 받은 본문의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1)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그 분의 속성이 필자를 그 분의 포로로 살게 하셨습니다. 필자는 금년이 목회를 시작한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처럼 30년이라는 세월을 목회 현장에서 살아온 목회자들은 아미도 대동소이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정의를 한다면 저의 의견에 강하게 반대하는 분들은 곧바로 그렇다면 당신은 왜 목회를 하는가? 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인정합니다. 그래서 궁색하지만 한 마디의 의견을 개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질되지 않기 위해 목회를 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목사로 사역하는 이유는 건방지게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군이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기 때문이요,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나는 변하지 않는 기질의 죗성이 있는 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품어주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사람이 변하고, 변하지 않고는 철저히 주군의 소관임을 인정하는 것이 목회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저와 독자 여러분의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2) 신앙이란 내가 주군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군이 나에게로 날마다 성실하심으로 다가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나를 괘념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항상, 늘 품어주시기 위해 내 곁으로 오십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3:1절을 읽다가 한 단어 때문에 울어버렸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라는 성실하심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내 주군 되심을 선포하며 찬양합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