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는 기차 안, 창밖을 응시하던 중년 사내가 돌연 ‘여보, 들판은 초록빛이네!’라고 외쳤다. 남편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맞아요. 제대로 봤네요. 여보!”
사내는 흥에 겨운 듯 말을 이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가 사내의 눈에는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듯했다.
“와, 태양은 불덩어리 같고, 구름은 하얗고, 하늘은 파랗고….”
승객들은 사내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지랖 넓은 승객 하나가 슬쩍 다가오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아내에게 귀엣말로 건넸다.
“아주머니, 남편 좀 병원에 데려가 봐요.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네요.”
객차 안은 어정쩡한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사내의 아내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궁금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승객이 딱하다는 투로 빈정거렸다.
“맞아, 정상이 아닌 것 같아.”
아내는 사람들의 이 같은 시선과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제 남편은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었어요. 최근에 각막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받았고 오늘 퇴원하는 날이랍니다. 이 세상 모든 풍경이, 풀 한 포기가, 햇살 한 줌이 남편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일 겁니다.” (언어의 온도, pp,62-63에서)
말글터 대표로 있는 작가 이기주가 쓴 ‘언어의 온도’에 나오는 글입니다. 작가는 이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부연하며 글을 맺습니다.
“대지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이가 없다.”
작가의 교과서적인 이 부연이 정답임을 부인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다가 그냥 눈물이 흘렀습니다. 책을 읽다가 흘리는 눈물의 맛을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작가의 감성적 글 솜씨가 가미된 글이기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시각을 찾은 주인공이 본인의 돌발적인 불행에도 운명적으로 좌절하지 않고, 비뚤어지지 않고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로 삶을 아름다운 직선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감사 때문에 눈시울을 붉힌 것 같습니다. 시력장애라는 장애가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고 한 남자의 눈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같이 달려온 그 아내의 그 아름다운 삶이 너무 고마워 또 그랬습니다.
자꾸만 되뇌게 되는 글 마무리의 시놉시스가 나에게 감정이입 되어서 그런지 또 그랬습니다.
“이 세상 모든 풍경이, 풀 한 포기가, 햇살 한 줌이 남편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일 겁니다.”
‘이게, 나라냐!’ 에서 시달린 진저리나는 지난 6개월, 이제 진짜 나라를 만들겠다는 호기로운 사람들의 언변과 서로를 물고 뜯는 소음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또 시달릴 한 달을 살아야 하는 오늘, 아내가 툭 던진 한 마디가 눈물 나게 고마운 것은 왜일까요?
김기석 목사의 ‘끙끙 앓는 하나님’을 손에 들었습니다. 읽다가 그의 고변 중에 이 글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갠지스 강 삼각주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강물을 정화시키는 맹그로브 나무처럼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대지를 정화시키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끙끙 앓는 하나님, p,77)
언어로 둔갑한 폭력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기에 그냥 숨쉬기도 쉽지 않은 나날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가져봅니다. 하나님의 진의를 보기 위하여 세속의 가치들에 눈감고 있는 자들이야 말로 쓰나미의 폭력 속에서도 꿋꿋하게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처처들을 속살 깊은 아름다움으로 지켜내는 맹그로브 나무일 테니까요.
베트남을 다녀오신 권사님이 주고 간 루앜 커피와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클리우디오 아라우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음악의 내음과 오식이를 위해 아내가 가져온 딸기 치즈타르트가 서재에 가득한 더 없는 행복을 주는 늦은 오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