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상상해야 하는 자리는 광야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예언자가 만들어지는 그 자리가 교회가 돌아가야 하는 자리이다.” (255쪽) 저자가 퍼부은 독설이지만, 그 소리가 아름답다. 나는 맹목적으로 교회에 비판을 가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 목소리에는 나 또한 그들에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들레기 위해 노력하며 목회해 왔다. 그러기에 저자의 소리가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내게 아픈 소리로 들렸지만, 겸허하게 저자의 일성에 아멘 했다. 저자는 제도권 교회의 한계와 올바르지 못한 일련의 일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비판적 성찰을 통해 메스를 댔다. 그 메스를 댄 일갈이 본서(本書)다. 만에 하나, 고루한 근본주의적인 상투성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 반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긴박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지성적 영성의 소유자라면 이 책을 섭렵해 보기를 추천한다. 저자의 이력은 특이하다. 이과 남자인데 문과적 연구를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그렇다. 본서, 『교회, 경계를 걷는 공동체』에서 저자는 책에서 분명 상당히 박식한 지적 능력을 전제로 교회에 대한 쓴소리를 거침없이 내뱉지만, 독특한 점은 저자가 천착한 것이 이론이라기보다는 끈적끈적한 한국교회 상황을 성찰하면서 경험한 현장적인 실제라는 점에서 신선했다. 저자는 교회에 닥친 위기감, 긴박성 등등 처한 현실 안에서 더 주목한 자료이기에 눈여겨 볼거리가 매 장마다 넘실댄다. 본서에서 저자가 집요하게 접근한 것은 ‘질문하기’였다. 질문을 봉쇄한다는 것은 지성과 결별하겠다는 선언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제기한다. ①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질문해야 하는 일들. ② 저자 스스로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교회지만, 다시 질문해야 하는 제 문제들. ③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상기하고, 복기해야 부르심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들. 저자는 이것을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본인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필자는 저자의 시도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자가 제기한 질문은 그 질문을 받는 자의 성향에 따라서 불온해 보이거나, 불손해 보일 수도 있는 테제들로 하부 항목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본서는 불편하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점은 저자가 왜 이 불편한 질문을 던졌는가에 대한 지적 함의(含意)다. 독서하며 자답한 것은 너무 아파서 던진 질문이라는 것과 한국교회가 본질적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충정의 마음에 던진 질문이기에 성실하게 저자의 다시 묻기를 성찰하고 답할 것은 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내게 스며 들었다. 필자는 내가 스스로 갖고 있는 개인적 성찰이니까 생각이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저자에게 동의한 게 하나 있다. 질문하는 것을 기꺼이 수용하는 교회가 과연 이 땅에 얼마나 존재할까의 답이 어렵다는 점이다. 필자는 한 달여 전에 출간한 책의 나가는 말에 이 글을 담았다.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교회는 중세 가톨릭과 다르지 않다. 필자는 본서를 집필하면서 사사 후기 시대 무대 주인공 삼손에 대해 계속 불온하게 비평하며 질문했다. 동시에 사사 이후 시대의 정체성도 줄곧 질문했다. 그 질문의 결과물이 본서다. 이 책을 덮으면서 필자는 후회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했기에 말이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 동연, 2024, 275쪽) 나는 한국교회에 밀어닥친 비극을 단말마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질문하는 것을 막아버린 비극이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가 펼쳐낸 본서의 제일 큰 공은 교회와 성도는 날마다 질문해야 함을 역설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질문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 복음주의권의 지성이라고 지칭되는 마크 A. 놀의 갈파를 들어보자. “삶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매 순간 세상을 지탱하시며 세상을 주관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지성을 추구하는 일은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 지성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지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크 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IVP, 322쪽)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예외없이 지성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자칫 잘못하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적절하게 다른 마크 A. 놀의 이 지적에 필자가 주목한 이유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지성이라는 논리에 동의하면서 곁들여 추구해야 할 건더기가 분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필자의 표현으로는 ‘질문하기’, 저자의 표현대로 언급한다면 ‘다시 묻기’다. Ⅰ부, ‘그리스도인 다시 묻기’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 사수해야 할 올바른 신학적 정체성에 대해 냉철하게 재정의할 것을 요구했다. 예컨대. ‘세미한 소리를 듣는 힘’에서 지성적 영성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말하기’보다 ‘듣기’에 더 천착할 것을 종용한 사례다. “신앙에서 중요한 침묵의 가치를, 개인과 교회가 되돌아보아야 할 때다. 말하기보다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앞세울 가치가 아닐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듣는 이들이 희귀하기 때문이다.” (37쪽) “기독교는 역설과 신비의 종교다. 비우는 만큼 채워지는 것은 역설이며, 복종하는 것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은 신비이다. 우리는 복종이나 순종이 더 이상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88쪽) 보편적 상투성과 치열한 투쟁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저자는 직설한다. 귀담아야 Maxim이다. Ⅱ부 교회, 다시 묻기는 필자 개인의 소견이기는 하지만, 논점 자체가 조금 더 치열해 보였다. 저자는 교회에 대해서 두 가지 철학을 강하게 역설한다. 하나는, 공동체성이고 또 하나는 이타성의 배격이다. 전자는 교회가 개인주의화 될 때 그것은 이미 교회로서 자격 미달임을 밝힌 것이고, 후자는 본회퍼식으로 해석하자면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라는 명제에 부합한 메시지다. 저자는 현존하는 교회가 이 두 가지 본질적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물론, 필자는 이 주장에 대해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가 아우르고 진단한 스펙트럼의 눈으로 볼 때 제도권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이타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해석을 견지한다는 이유는 보편성 때문이리라고 짐작한다. 저자의 주장에 일견 동의하지만, 전적인 동의를 보낼 수 없는 이유는 보이는 교회의 미성숙함과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벽하게 이루어질 때까지의 여전히 남게 될 필연적 상황이라고 필자는 보기 때문에, 저자가 제시한 수도원 공동체와 같은 대안 제시가 그리 탁월해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기존 교회의 구조 안에서 압도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지배당하며 점진적으로 조각되어 나가는 것이 혁명적이지 않아 안심할 수 있다고 보기에 저자가 주장한 공동체성 회복, 이타성 복기라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방법론에 선뜻 손을 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비평적 성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심오하게 역설한 공동체성과 이타성은 거대하게 늙어버린 공룡 같은 한국교회가 귀에 담아야 할 경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Ⅲ부, ‘소명 다시 묻기’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교회의 자리는 어디일까?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크리스티아누스들의 ‘삶의 정황’은 어디일까? 저자는 그 답을 소명 다시 묻기를 통해 컨펌한다. 지면 관계상, 한 가지 토로를 나누어 본다, ‘곁의 곁을 지키는 것’ 즉 ‘환대’의 신학화이다. 저자는 ‘환대’를 경계선 지우기로, 조각난 시간표 메우기로 설명한다. “환대는 내부자들을 따뜻하게 대접하고 친교를 쌓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낯선 사람, 이방인, 나그네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호의와 적의로 구분된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학적, 교리적 이유를 분명히 갖고 있는 집단이라면, 그들을 아무리 따뜻하게 사람을 환영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참된 환대가 되지 못한다.” (199쪽) 기독교가 극복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갈라치기다. 배타성의 오류다. 기실, 님비주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다. 환대라는 명제에 대해서 가장 명징한 삶을 보여준 존재가 있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왜? ‘성육신’은 환대의 극치였기 때문이다. 주께서 내게 오셨다는 고집으로 머물면 그것은 독선이요, 아집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대상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함이었다. 이 성육신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하면 기독교는 국수주의로 변질된다. 국수주의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적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기에 국수주의의 카운터파트가 ‘환대’라는 말은 적확하다. 인류학자 김현경이 정의한 말이 오롯하다. “환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며, 이런 인정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몸짓과 말 전체를 의미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208쪽)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영성 사역자인 토마스 머튼의 일갈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이와 하나 됨을 실현하기를 추구한다.” (토마스 머튼, 『박재찬,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의 만남』, 분도출판사, 130쪽) 저자는 ‘다시 질문하기’라는 화두를 갖고 지성적 영성을 기초로 독자인 우리에게 도발했다. 쓴소리, 아픈 소리가 내내 울린다. 책을 덮으면서 저자가 글의 말미에 쓴 이 글을 이내 생각했다. “종교란 마지막으로 찾아갈 희망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244쪽) 그러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사랑하는 교회는 희망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끝내 마지막으로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일까? 이 질문에 답해야 했기에 긴장했다. 부제가 이렇게 적시되어 있다.
“한 인문주의자의 성경 읽기” 교회와 지도자들이 경원시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인문주의자라는 선입관에서 탈피하여 그들이 말하는 교회를 향한 올바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다시 설 수 있는 방법임을 독서하며 배웠다. 내일, 섬기는 교회가 3차 독서 여행을 떠난다. 공유할 자료이기에 또한 감사한다.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지성적 영성이 농익는 10월이 되기를 소망하며 화살기도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