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민음사, 2022년)를 읽고2024-07-30 12:3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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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닙니다. 책을 읽음으로써 책을 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인간이 생각한다는 건 그 정신이 어떻게 작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있지요. 이를 통해 사람은 발견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는지 깨닫게 하고, 결국은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가능하게 하지요.”(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 위즈덤하우스, 4950)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이 지적이 내게 금싸라기처럼 다가온 이유는 독서는 결국 나 자신과 만나는 일의 부분이라고 적시한 문장 때문이다. 나는 한 달 10권 미만의 책을 만난다. 저자들을 만나는 일인데, 놀라운 일은 책을 덮고 나면 또 한 번 다시 나를 만난다는 아주 묘한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 오에 겐자부로의 말이 얼마나 적확한가?

정혜윤 작가는 이 놀라운 일을 내게 고스란히 선물했다. 저자는 장을 읽고 나면 어김없이 나를 재발견하게 해 주었다. 놀라운 신선함으로 저자는 나를 도전했다. 9개 꼭지를 전개하면서 나로 실망하지 않도록 공부하게 했다. 처음 만난 저자였지만 저자는 적어도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10년쯤 된 것 같다. 서울에 있는 대단히 진보적인 교회에서 설교 의뢰가 들어왔다. 설교를 마치고 설교자와 그 교회 교우들이 대담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교회의 한 지체가 내게 이렇게 도전하며 치고 들어왔다.

 

목사님의 저서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을 읽었습니다. 나도 책을 읽고 싶습니다. 나도 목사님처럼 시간이 많으면 얼마든지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제기하신 것처럼 저 또한 1년이 100권 독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에도 바쁩니다.”

 

제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윽박지르는 질문 겸 소리를 듣고 제가 그에게 대답했다. 내겐 그럴 때는 지지 않는 오기가 있다.

형제님, 목사가 시간이 많다고 하시는데 그건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상식적인 목회 하는 대다수 목사는 잠이 부족합니다. 시간이 많은 게 아니라,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했으니 답하겠습니다. 먹고 살기가 바쁘시니까 독서가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읽으시고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형제가 읽은 내용의 분량만큼만 성장하게 한다는 것에 불만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정직한 태도입니다.”

 

본서의 저자는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게으름의 문제다.”

 

이 도전적인 발언을 한 저자는 곧이어 이렇게 도발한다.

게으름은 자가 자신을 얕보는 행위입니다.”(58)

 

오래전, 독서의 내공이 없었던 시절, 독서할 때마다 이런 소회가 내게 다가와 나를 공격했다.

 

내가 이렇게 능력이 없는 존재였던가!”

 

이전 소회는 그러했지만, 독서의 내공이 조금씩 깊어지면서 이런 시름도 축소되고 있다. 지속적인 독서가 주는 선물이다. 변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사람은 없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게으른 거다.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죠?

 

저자가 이 질문에 답하면서 멋진 해제를 하나 내놓았다.

 

능력은 천부적 자질이나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잊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데서 나옵니다.” (52)

 

저자가 역설한 이 글감을 내게 적용하면 대단히 적절해 보인다. 그랬던 것 같다. 목사직을 받았던 때(1992)는 그래도 목사직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한국교회가 기울어져 가는 때였지만, 2024년 오늘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말의 서광이 비췰 것이라는 기대감이 교회와 목사에게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쇠퇴해 가는 목사직, 교회의 위상을 보면서 수없이 많은 자괴감에 못 견뎌 하며 잠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이 정도면 포기할 만도 한데, 필자는 거룩한 오기가 더 발동했고, 매를 맞으면 맞을수록 맷집도 커졌다. 비상식을 갖고 우기는 맷집이 아니다. 그러니까 더 정직해야 하고, 더 상식을 존중해야 하고, 더 높고 깊은 윤리적 가치를 부여잡아야 하고, 에토스적으로나, 파토스적으로나, 로고스적으로 거의 온전한 상태를 만들어가야 할 대상이 교회요, 목사라고 고집하는 결기가 성큼 다가왔다. 한편이 되겠지만, 필자는 이런 맥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글을 쓰고, 말하고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며 치열하게 살았고, 또 살고 있다. 저자의 말은 옳다.

 

책은 고독함,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독함이다.” (레베카 솔닛, 멀고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반비, 86)

 

여류 사회학자이자 비평가인 레베카 솔닛의 토로가 오롯이 다가온 것은 이 정도의 사유함은 내가 지향하고 이루려는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 본 경험이 있는 자가 그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없이 책과 씨름하며 그 안에서 발견한 보훈들을 자기에게 적용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성찰이고 통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점은 책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목적한 바를 이루려는 치열함이다.

 

삶이 불안한데 책을 읽어야 하나요?”

 

저자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면서 대단히 중요한 통찰을 내놓는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의 조건과 한계를 넘어섭니다. 이 근본적인 비대칭성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균형을 잡고 살 수 있습니다. 선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 혹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놀라운 결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66)

 

저자의 일갈을 따라가다 보면 나름의 철학적 관조가 일어난다. 불안이라는 내재적 심리나 혹은 현실적인 곤비함 때문에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고난스러운 과정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불안 그 자체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불안과 맞서 싸우면서 경험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일들을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일이라는 저자의 에두름에 나 또한 지지표를 던진다.

오래전에 숙독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지성적 삶을 엄청나게 길라잡이 역할을 해 준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소중한 책이 있다. 읽다가 글쓴이인 함석헌 선생이 피력한 이 글을 파일에 담아 둔 적이 있다.

 

우리의 바탈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착한 것이 나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잃었던 용기를 다시 찾기 위하여, 약아빠짐으로 인해 타락해 버린 지혜를 도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중간에 생긴 종살이 버릇을 없애기 위하여, 굳센 의지가 자아가 되고 고결한 혼을 다듬어내기 위하여 불같은 고난이 필요하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465)

 

나는 이처럼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한 도구가 책이라고 확신한다. 책 읽기는 고단한 작업이며, 내가 나 되지 못한 것에 자책하며, 후회하게 하는 아픔도 느끼게 해 주는 일이다. 하지만 독서하는 내내 독자는 그가 갖고 있는 존재론적인, 철학적인, 종교적인 해제를 통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불안을 이기게 해 준다. 책을 읽어야 하는 당위다.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위로 중 하나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99)

 

목사로 살기에 희비의 양극단을 곧잘 경험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삶을 사는 괴물을 목도 하는 일과 도무지 신앙의 이름이라는 인용 말고는 다른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신앙의 이력을 남기는 이들을 보는 일이다. 현장 목회자로 살아온 지 벌써 오래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기에 해묵은 것처럼 여겨지지만, 한겨레 신문의 종교 담당 조현 기자가 쓴 칼럼에서 읽었던 시리도록 아픈 문장이 있었다.

 

교회와 절과 성당이 주는 메시지가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메시지도 담아낼 수 없는 영혼을 울리는 메시지가 아니라, 세상과 똑같은, 아니면 정말 비극적이고 참담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의 메시지보다 못한 천박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퍼 나른다면 도대체 교회와 절과 성당에 나갈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섬기는 교회 지체가 어느날, 사석에서 이런 비수를 날렸던 적이 있다.

목사님, 일주일 삶의 현장에서 극히 세속적인 아류와 어울리다 보니 나 또한 타협하고, 절충하고, 혼합해 적당히 살았습니다. 몹시 괴롭고 힘든 일주일을 살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쓰러지지 않은 이유는 희미하나마 갖고 있는 주를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매섭게 경종하고 때리셔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라는 아픈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자괴감을 가지고 교회에 나갔는데, 예배 시간에 설교하는 담임목사의 메시지가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주님이 그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께 다 내려놓으면 주님이 위로하실 겁니다. 그만큼 해도 선방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살아낸 삶의 반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러니 잘 사신 겁니다. 괜찮다고 귀에 달콤하게 전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정말이지 신앙생활을 포기할까? 생각할 정도로 치욕을 당하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나같이 양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교회에 있어도 교회는 교회의 소리를 내야하고, 목회자는 벼락과 천둥소리로 성도를 경책시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참 목회가 쉽지 않다. 이런 성도, 저런 신자에게 구색 맞추기를 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날 지체가 던진 이 비수가 너무 좋았다. 더불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근래 경험하지 못했던 위로였다. 내가 왜 목회자로 바로 서야 하는가 야단치는 예언자의 소리로 들었다. 책 안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이 비일비재하다. 여기저기에서 독자인 내게 카운터펀치를 날리곤 한다. 매맞고 그로기 상태에 빠질 때가 많지만, 나는 그때마다 행복하다. 책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감동이다.

재미 저널리스트인 안희경이 최재천 교수와 대담하며 엮은 최재천의 공부에서 질문자 안희경이 이렇게 갈파한 문장을 보았다.

 

공부란 한 사람을 성숙시키는 길이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개체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을 사려 깊게 만드는 도구 같아요. 공부가 익을수록 우리는 관계를 보살피는 방향으로 나아가겠죠. 삶으로서의 공부로 다가옵니다.”(최재천, 안희경, 최재천의 공부,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김영사, 2023, 293)

 

두 지성인의 대담을 간파하면서 나는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때 주어지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아름다움을 만나는 장소가 책이며, 그 책 안에서 받는 위로가 실로 엄청남을 정혜윤은 네 번째 질문의 답으로 제시한 셈이다. , 위로를 주는가? 말해 무엇하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로의 진원지가 책이다.

그렇게 살아도 돼요?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진 9번째 질문이자 본인도 스스로 던지는 질문을 책의 마지막 단원에서 제기했다. 저자는 이 질문에서 그렇게를 부각한다. 도대체 그렇게그렇게가 무엇인가?

답변이 어렵다고 저자는 에두른다. 이유는 이렇다. ‘그렇게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들의 불투명성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해제다. 하지만 저자는 뒷손 지는 것으로 그렇게에 대해 해설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최선을 다한 그렇게에 대한 해석을 들어보자.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 말고, ‘살아 있는 삶’, 즉 인간이라면, 꿈꾸는 존재라면 그렇게한 번 살아 봐야 하는 삶에 대해 자꾸만 말하게 합니다. 그 말로 우리를 채웁니다. 그렇게는 이렇습니다. 당신이 책을 읽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 주십시오.” (242)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가 영혼을 위한 깨달음의 길을 열 가지로 제시한 수작이 있다. 그 길 중에 7번째 길인 사랑의 계단에 기록한 글말 하나를 나누려고 한다.

 

모든 사람 안에는 귀중한 그 무언가가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숨겨져 있는 것, 동료 중에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것 때문에 각각의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마틴 부버, 열계단, 대한기독교서회, 2009, 169)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진정성이 있게 존중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인간이기에 살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방법론을 자기에게 국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는 단어의 함의를 깊이 성찰할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이 목사인 내게 큰 대못을 하나 박았던 문장이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모호하다. 낡고 평범한 문제가 되었다. 어떤 이에게는 호모 사피엔스가 하늘의 걸작품이라고 여전히 믿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에게는 자연의 유일한 실패작이기에 그렇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사 사람인가?, 한국기독교 연구소, 2008, 37)

 

나는 책을 읽는다. 그냥 취미로 읽지 않고, 최재천 교수의 일갈처럼 빡세게(?) 읽는다. 왜 이리도 책에 대해 집요할까? 책을 읽지 않으면 나는 나 스스로 자연의 유일한 실패작이 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걸작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렇게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할 가능성이 100%이기에 그렇다.

글을 마치려 한다. 본서의 반도 소개하지 않았다. 글의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필자의 북-리뷰를 읽는 독자 한 명이 내게 이렇게 읍소한 것에 대한 반항 때문이다.

목사님, 열심히 서평 해 주세요. 나는 그 부스러기로 만족하겠습니다.”

 

매우 나쁜 일이다. -리뷰는 독서하라는 미끼 던지기다. 책 하나를 서평으로 만족하라고 쓰는 게 아니다. 전체를 독서하지 않는 일은 게으르다는 증거다. 이렇게 얄팍한 마음을 갖고 있는 독자는 본서의 책 제목으로 타격한다면 삶을 바꾸지 못한다. 정혜윤 작가의 본서는 깊이 잠들어 있기에 자연의 유일한 실패작으로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있는 나와 그대를 타격하여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바꾸어 주는 혁명적 수작이다. 꾀병 부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