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부럽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는 데 나는 김 목사에게 졌다. 왜? 그가 은퇴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럴 나이고, 점점 나 또한 은퇴의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기에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은퇴하고 난 뒤의 삶은 어떨까? 아직은 그냥 상상하는 정도지만,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면 이 상상이 더 구체화 될 것이기에 아주 조금씩이라도 은퇴 후를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기에 긴장한다.
먼저, 김 목사께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상투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설교를 준비하고, 전해야 하는 부담의 나라에서 탈출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필자는 이게 참 부럽다. 은퇴 고변이라고 할까. 한 달 여전, 김기석 목사가 남긴 『고백의 언어들』를 읽다가, 교단은 다르지만 내가 본받으려 했던 목회 선배가 저자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했는지 모른다.
저서의 형식이 벤쿠버기독교세계대학원에 강의했던 다섯 차례의 강의록을 묶은 글이라고 하지만, 필자는 저자가 강의하기 위해 쓴 자료로만이 아니라, 마치 저자의 목회 고백록(the confession)처럼 다가왔기에 귀했다.
“20대 이후 목회자로 살았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에 대해 확연하게 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9쪽)
저자와 같은 목회자의 길을 35년간 걸어온 필자는 이 문장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삶을 위한 신학』, IVP, 32쪽)
저자가 일설(一說)한 이 고백으로부터 본서는 시작한다. 결국, 목회자란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엎드려 해석하며 가장 근접한 하나님의 레마를 치열하게 경험하는 사람이라는 정점에 피리어드를 찍는다. 이렇게 평생을 걸쳐도 알 수 없는 분이 주군이시다. 사정이 이런데 그분에 대해서 설교해야 하고, 설명해야 하는 운명을 살아야 하는 목사는 죽을 맛이 아닐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저자와 같은 목회자로 살아간 본받을 수 있는 선배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뒤돌아보면 설교자로 살고 있는 필자는 ‘설교하기’라는 무게감에 짓눌려 살았다. 짓눌렸다는 표현이 조금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철회하거나 취소할 수는 없다. 혹자들은 설교 준비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강단에 올라가면 성령께서 설교할 말씀을 직통으로 주시기 때문이라는 데, 나는 그치가 부럽다. 내게는 한 번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은혜를 받지 못한 죄로 필자는 류호준 박사의 일갈을 심비(心碑)에 새기며 치열하게 전투할 수밖에 없었다.
“설교가 가벼워지는 것은 설교자가 설교 자체로부터 이완되었기 때문이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 141쪽)
부인할 수 없는 신학자의 고언이다. 류 박사는 이렇게 선포한 후에 고삐를 더 죄었다.
“설교자라는 한 인격체가 설교의 주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는 ‘나’ 역시 상징이자 사인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내가 하는 말로 표현하는 것 이상을 말하고 있는 상징이며 사인이라는 뜻입니다. 강단에서 단수형 일인칭으로 서 있는 설교자 자신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상징인 것입니다.” (위의 책, 142쪽)
이런 차원에서 접근할 때, 필자에게 저자야말로 설교자로서의 상징과 사인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며 실천신학적 균형을 가르쳐 준 롤-모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그가 섬기던 교회 현장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남긴 김기석의 ‘the confession’을 이런 이유로 필자도 강단에서 내려오는 그날까지 가슴에 품어야 할 시금석으로 삼기로 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저자는 목회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의 삶의 기록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저자가 제일 먼저 다룬 인간에 대한 신학적, 인문학적 담론은 부스러기를 주워 담기만 해도 행복하다.
저자가 직시한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한다. 유한하기에 불안하고 흔들린다. 흔들리는 자가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흔들리는 불안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자기중심성이 아닌, 타자 중심성으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불완전함을 그나마 완전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통로가 타자중심적 삶이다.
“나 자신이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여야 한다.” (26쪽)
아프리카 격언 중에 ‘우분투’가 있다. ‘우분투’를 풀면 이렇다.
“I am because you are.”
그렇다. 저자의 말대로 인간은 서로에게 속한 존재다. 그는 1강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내가 존중받아야 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처럼 대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실천 토대입니다.” (73쪽)
이 목회적 철학으로 교회와 성도를 섬긴다면 아름다운 현장 목회를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다섯 번째 강의 “나의 인생, 나의 하나님”을 다루어 보자. 이 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프롤로그를 썼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태어났고,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가는 궁극적인 지점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불안에 시달리고 때때로 흔들리지만, 대지에 발을 굳게 딛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될 때 희망이 이 세상에 유입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파악될 수 있는 분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시간 속에서 우리와 동행하며 사건을 일으키는 분이고, 그 사건을 통해 평화의 나라가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올 것입니다.” (288쪽)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불안이 하나님은 물론, 타인과의 분리에서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팔자는 저자의 소회에 동의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려는 것인지, 저자는 연이어 신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내면화하면서 자기 나름의 신앙관을 형성합니다. 삶의 복수성과 다양성을 경험하면서 그 알이 단단해져 갑니다. 그러나 자기가 형성한 알을 절대화하기 시작할 때 파탄이 시작됩니다. 그 속에 갇히는 순간 교조적으로 변하고,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함을 보이며, 폭력적인 태도로 다른 이들을 동화시키려고 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이 위험한 것은 자기와 다른 것들을 비진리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294쪽)
필자는 어제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 교정 전 원고를 마무리했다. 에필로그에 A.J. 크로닌의 걸작 『천국의 열쇠』에 담겨 있는 클라이맥스 부분을 담았다.
중국에 몰아닥친 페스트로 인해 프랜신스 치셤 신부가 사역하던 외방전교회 일대에도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치셤의 절친이지만 무신론자였던 의사 셜록이 치셤의 사목 지역으로 자원하여 도착했고, 그곳에서 많은 환자를 돕다가 본인도 결국 페스트의 감염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치셤은 임종을 앞둔 셜록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지만 무신론자 셜록은 끝내 회심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치셤은 셜록에게 임종 성사를 진행한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가 치셤에게 반기를 들고 저항한다. 비신자에게 임종 성사를 하는 게 가톨릭의 교리와 전통에 반하는 이단적 행위라는 것이 수녀의 지론이자 저항 이유였다. 매섭게 저항하는 원장 수녀에게 치셤 신부가 전한 메시지는 적어도 내게는 충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감동이었기에 졸저 원고를 교정 후 출판사에 넘기기에 앞서 나가는 말에 이 내용을 담았다.
“나름의 종교를 신실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참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반짝이는 눈으로, 점잖은 불가지론자를 보고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봐라, 내가 여기 있다. 너는 한사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여기에 있다. 네가 그렇게 없다고 주장하던 천국에 들어가거라.” (A.J. 크로닌, 『천국의 열쇠』, 이윤기역, 섬앤섬, 2014, 383.)
치셤의 말을 인정하는 자를 가리켜 이단적 사상을 갖고 있는 반기독교적인 불온한 인물이라고 벌 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필자가 이 글을 졸저에 담은 것은 치셤의 논리를 교리적 차원의 가부로 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할 때 결코 양보할 수 있는 요소 중의 하나가 ‘타자에 대한 환대(Hospitality)’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집중된 ‘나’는 엄격한 잣대로 바라보면 ‘괴물’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 대하여 열려 있고 포용할 때만 건강한 ‘나’로 존재할 수 있다. 하물며 신앙인이 폐쇄된 공간 안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위험함을 넘어 해롭기까지 한 존재다.
몇 해 전, 참 의미 있게 읽었던 나희덕 시인의 시어가 나를 강타한 적이 있어 한동안 그 감동의 충격으로 인해 나를 철저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녹슬어 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 먹었다.”(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조롱의 문제에서』, 문학과 지성사, 106쪽)
타자를 배제한 나의 신앙적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내게 임하는 치명타는 내가 녹슬어 가는데도 그것을 감각 하지 못한다는 무통증과 무감각의 재앙이다. 감각함과 환대함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자 은총이다.
김 목사의 은퇴 기념이라고 할 수 있는 본서는 총 5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매 장(章)마다 소개하고 싶은 주옥같은 글감들이 지천이다. 하지만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기에 욕심 버리기를 실천했다. 두 꼭지에 담긴 글 중에 독자들과 꼭 나누고 싶은 내용을 발췌해서 간단한 리뷰를 기록했다. 글을 닫으며 아쉽기에 꼭 전하고 싶은 고언(苦言)이 있다. 이 책만큼은 꼭 독서하라는 당부다. 특히 목회 현장에서 뛰고 있는 동역자들이라면 꼭 만나기를 권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류호준 박사가 전한 금과옥조의 당부가 있다.
“설교는 무언가를 알려줄(inform) 뿐 아니라,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form) 일입니다.” (류호준, 위의 책, 138쪽)
나는 이 무겁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선배가 너무 부럽다. 하지만, 부러운 선배에게 부탁 하나를 하고 싶다. 내가 먹고 살 부스러기는 계속 나누어주시기를. 김 목사께서 건강하시기를 화살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