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희 교수의 『구약 예언서 수업』을 읽고 (2024년 감은사 간) 성서 신학자가 쓴 책에서 은혜(?)를 받는다. 있을 수 없는 명제다. 현장 목회자로 살아온 지난 35년이라는 세월이 자연스럽게 알려준 일이다. 성서 신학자들이 저술한 책은 신학적 지식 습득을 위한 길라잡이 역할만 해 주어도 사명 완수다. 아주 가끔은 이 책이 학술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가 쓴 게 맞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의외 책도 만나 당혹스러울 때가 있지만, 필자가 만난 성서학자들이 집필한 대부분의 저서들은 목회자가 공부하도록 도와주는 정도만 기여 해도 수훈갑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거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의 책은 돌연변이다. 흔히 시쳇말로 은혜를 받게 만드는 신학적 서적이 있다고 칠 때, 독자들의 반응은 식상함이나 또 그것도 아니면 조금은 학문적인 질이 떨어진다든지 등등의 혹평을 받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본서는 구약신학적인 신선함이 담보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든다면 4장에 기술한 『예언 선포의 의도』 같은 경우다. 저자는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의도에 대해 기존 신학계에 소개되어 대두했던 두 가지의 내용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⓵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한 목적으로 사회 개혁을 겨냥한 사회 비판(sozialkritik)이라는 팩트다. ⓶ 올바른 행실로 돌이키려는 회개 촉구(Bußruf)라는 팩트다. 예언자들이 전했던 예언의 의도에 대한 ⓵⓶ 이해는 필자도 익숙하다. 필자가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로 ‘나비’들의 예언의 소리를 이해한 것은 80년대 중후반 대학원 시절, 시대적 암울함 때문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글들을 천착할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보적 신학의 영역으로 간주 된 남미 신학자들과 서남동 박사가 쓴 『일하는 사람들의 성서』와 안병무 박사의 걸작인 『역사와 해석』을 읽으면서 눈을 뜨게 해 주었을 때 예언자들의 소리가 이렇게 들렸던 기억이 생생하기에 저자가 소개한 ⓵의 해제는 낯설지 않았다. 반면 회개 촉구의 메시지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전수받은 것은 내가 공부했던 학부와 본대학원에서 선생님들에 의해 수없이 들었던 내용물이었기에 저자의 소개는 더더욱 익숙한 전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예언자들의 선포 의도를 ⓵⓶의 카테고리에서 머물지 않고 저자만의 학자적 지론으로 제 ⓷안을 본서에서 소개한다. ⓷의 주장은 이렇다. 예언 선포의 의도를 임박한 심판을 알리는 미래 선고의 성격으로 해석한 주장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언 선포의 의도를 회개 촉구로 파악하는 것(⓶)은 이미 한국 성서학계는 물론, 한국 교계에서도 아무런 비판 없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케 하려고 회개를 부르짖었다고 본다. 이것이 포로기 내지는 포로기 이후 예언자를 가리킨다면 부분적으로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은 포로기 이전 예언 활동의 황금기였던 주전 8세기의 예언 선포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예언 선포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108쪽) 저자가 이런 주장을 전개한 이유는 예언자들의 예언 내용을 단지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 시대로 국한 것에 대한 비평적 성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예언자들의 폭에 대한 외연 확장을 요구한 셈이다. 결국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고전적 예언자” (14쪽)를 배제한 이해 때문에 예언자들의 의도를 협의로 해석했다는 저자의 비평적 성찰을 필자도 동의한다. 한국교회는 특히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예언의 소리에 극도의 경계심이 있는 듯하다. 레드 콤플렉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유감천만이다. 아모스 예언의 내용을 논하지 않는 예언서 이해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 재론하지만 이 논지 전개가 필자가 저자에게 받은 첫 번째 은혜다. 수년 전에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구약성서 톺아보기』라는 세미나를 교우들 대상으로 개최한 적이 있었다. 3명의 구약학자를 초청해서 사역을 진행했는데, 당시 저자에게 부탁한 파트가 저자의 전공 분야인 『예언서』였다. 오전 예배에는 예언서 본문으로 설교를, 오후 시간에는 예언서 톺아보기를 강의했는데 교우들이 수준 높은 강의 때문에 행복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오전 설교 시간에 저자가 설교 텍스트로 정한 본문이 미가 6:6〜8절이었고, 설교 제목은 『사람을 찾습니다.』였다. 저자는 설교를 통해 아하스 치세에 벌어졌던 유다의 랜덤을 고발했고,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미슈파트와 헤세드와 차나를 겸비하여 삶 속에서 윤리적 행위를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강조하며 말씀을 전했다. 저자가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사역하고 간 6개월 후 즈음에 필자는 저자의 요청이 있어 한세대학교 영산신학대학원 정기 채플 강사로 섬겼다. 그날 필자가 택한 본문은 미가 6:6〜8절이었고 설교 제목은 『당신이 하나님이 찾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였다. 필자는 그날, 신대원생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미슈파트와 헤쎄드와 차나로 무장하여 무너져 가고 있는 한국교회를 다시 살려야 할 주인공들이 바로 당신들입니다.” 그만큼 미가 6:6〜8절은 저자는 물론 필자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성서 텍스트 중에 하나다. 저자는 미가 6:6〜8절의 편집 연대를 통상 이해되는 주전 8세기에서 포로기 이후의 작품으로 끌어내려 해제했다. “미가 6:1〜8절은 보통 포로기 이후의 작품으로 간주 되는 미가서의 세 번째 부분에 속해 있지만, 이 부분을 주전 8세기 미가의 것으로 보는 주장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루돌프는 특히 미가 6:7b에 언급된 人身祭儀가 아하스 시대(BC 741-725)의 관습과 잘 어울린다는 점을 들어 이 단락의 진정성을 고수하고 있다.”(225-226쪽) 인신제의는 하나님 신앙과 척지는 대단히 위험한 이방 종교적 행위임을 인지한다. 아하스 시대가 그랬다. 하나님과 등진 아하스 치세에 벌어진 난장의 자화상이다. 저자가 미가 6:1〜8절 단락의 시기적 설정을 집요하게 추적한 이유는 이때가 포로기 시기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함이다. 포로기 시기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회복해야 하는 일은 야훼 하나님과 무너진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미가 6:8절의 메시지를 이렇게 재정의하고 있는데 탁월하다. “곧 8절의 요구는 하나님 앞에서(vor Gott)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mit Gott) 동행하며 걷는 것이다.”(242쪽)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인 어떤 행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미가 6:6〜8절이 주는 메시지라고 선언한 저자의 미가 6장 담론 해석이 필자가 두 번째로 받은 은혜다. 저자는 6:6〜8절 연구를 빠져나가며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신앙적 삶은 윤리적 삶과 다르지 않다. 야훼 하나님은 윤리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참 신앙인은 참 윤리적이어야 한다. 신앙인은 인간적 차원을 넘어서 신학적 차원에서 윤리성을 요구받는다.” (67쪽) 아멘한다. 본서가 성서 신학자가 쓴 신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 은혜가 되었다고 전술한 그 사례들은 1부, 2부를 통해 각 실례를 들었다. 하지만 현장 목회자라면 저자가 독특한 성서학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증거들이 제3부에 여지없이 열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에 도전하려는 독자가 있다면 3부를 설교 노트나 파일에 스크랩해야 일들이 많을 것임을 미리 논한다. 필자는 한 부분만 소개한다. 어제 부활주일에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전한 주일 설교 원고 안에 담은 예화 하나 소개한다. 이번 주에 목사 안수를 받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권하는 편지의 일부분이다. 아버지가 오래전에, 감동의 파노라마를 느끼며 읽었던 유대 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글을 하나 소개하고 싶구나. “그분의 존재에 대한 확신에 도달한다고 해서 신앙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신비를 넘어서 있는 그분과 합일하려는 격렬한 갈망의 시작이며,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힘과 영적으로 우리를 넘어서 있는 모든 힘을 하나 되게 하려는 열망의 시작이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한국기독교연구소, 206-207) 엄청난 성찰이다. 아들아, 섣불리 신앙을 정의하지 않기를 바란다. 신앙의 정의는 목사로 살아가는 동안, 아들이 삶의 체화를 통해 인격적으로 경험한 것만이 올바른 신앙의 내용물임을 알고 섬기는 교우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렇게 신중하게 목회하는 목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어디 이뿐이겠나 싶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하고 싶구나. 아버지는 아들이 걷는 목사라는 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좌충우돌하고 또 이리저리로 흔들리기는 하겠지만 젊은 날에 불온함과 흔들림이 없이 승승장구하는 자에게 무슨 뿌리 깊은 영성을 기대할 수 있겠나 싶어 아들이 주군께 묻고 질문하는 목사가 되어주기를 정말로 기대한다. 아들, 너도 좋아하는 차준희 교수가 이번에 출간한 책 『구약 예언서 수업』을 읽다가 정말로 예기치 않은 은혜를 받았단다. 차 교수가 김기석 목사의 글을 자기 책에 이렇게 인용했구나. “망설임은 ‘성실성의 증거’이고, 확신은 ‘사기의 증거’일 수도 있다. 너무 지나친 말일지 모르겠지만 회의 없는 강철같은 확신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삶 자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모호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 아닌가!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는다. 무릇 살아 있는 것들은 다 흔들리게 마련이다.”(차준희, 『구약 예언서』, 감은사, 407-408) (2024년 3월 31일 제천세인교회 주일 설교 원고에서) 저자가 재인용한 글을 교우들과 아들에게 전했다. 전율하는 감동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필자와 신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절친인데, 나는 언제나 친구가 갖고 있는 지성적 영성이 부러워 열등감을 갖고 있다. 지성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성서 신학자는 여기저기 지천에 깔려 있다. 하지만 지성적 영성을 갖춘 신학자는 적어도 내가 보는 시각 안에서 그리 많지 않다. 예언자들을 지칭해 흔들리며 살았던 자라고 정의한 저자의 일성(一聲)은 압권이요, 울림이다. 이렇게 성찰하고 갈파한다는 것은 웬만한 지성적 영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이해이기에 말이다. 칭찬 일색이라 조금은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여타 다른 저자의 책을 리뷰할 때 주저 없이 비평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66번째 저자의 책은 박수를 많이 쳐주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글감을 남기는 것으로 그 수고를 격려한다. 저자가 내 친구인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이제 교수로 4학기만 남았다는 친구의 슬픈 소리가 왠지 한국 교회에 들리는 아쉬움의 소리로 들려 나도 유감이다. 아직 저자가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위해 할 일이 많이 있기에 말이다. 준희야, 정말 수고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