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의 『어두워진다는 것』을 읽고 (창비, 2022년 간) “저 낡은 소리는/어떤 상처를 읽은 것이다” (80쪽, 축음기의 역사에서) 평자는 시인 나희덕이 참 좋다. 이런 천재적 통찰을 할 수 길벗이라서. 시인은 계속 이어지는 련(聯)에서 이렇게 시어를 낭송한다.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상처의 길은/더 깊게 패이거나 덧나지 않는다/닳아가는 것은/그것을 읽는 바늘 끝일 뿐” (같은 페이지) 세월의 흐름을 이제 완연히 느끼는 나이가 되고 보니, 상처를 소리로 기록할 수 있다는 시인의 고백이 왜 이리 절절하게 들리는지 애절하기까지 하다. 분위기는 스산한데 삶의 고갱이가 시인의 토로에서 더 선명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아쉬움 때문일 거다. 삶의 굴곡을 진하게 경험한 이는 상처와 통증이 선명하리라. 하지만 시인의 어조는 반전이다. 통증과 상처를 ‘소리화’ 시켰다는 것은 삶을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여기지 않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이자 선물이라고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 내게 주어지는 상처를 가리켜서 시인은 깊이 패이거나, 덧나지 않는다고 역설한 듯하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사선이다/세상에 대한 어긋남을/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수직으로 흘러내린다/사선을 삼키면서 (중략) 뛰어내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90쪽, 빗방울, 빗방울에서) 과연 누가 ‘어긋남’이라는 명제를 바람이 부는 날, 혹은 달리는 차 창 밖으로 보이는 내리는 사선의 비로 은유화할 수 있단 말인가! 시인 말고는 없다. 이 시집의 해제를 맡은 유성호 교수가 시집 末尾에 이렇게 일갈했다. “이 시대에 새로운 신(神)인 ‘자본’과 맞서는, 또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시’라고 그나 나나 생각하고 있다. 그가 시인으로서, 판관이나 선지자로서보다는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깨어서 지키고 보살피는 파수꾼이나 불침번에 가까워 보이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유성호, 발문‘ 115-116쪽) 유 교수는 시집의 跋文에서 시인의 역할을 파수꾼이나 불침번이라고 겸손히 에둘렀지만, 나는 도리어 앞의 단어들이 시인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피력하고 싶다. 시가 없는 삶, 시어가 사라진 시대, 시인이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는 희망이 없는 절망 그 자체라고 말하면 과언일까? 그들이야말로 판관이요, 선지자들이기에 그렇다. 시인은 『상현(上弦)』에서 대단히 파토스적인 어휘를 동원하여 독자들을 흥분시킨다.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신(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다니!” (9쪽 상현에서) 나는 목사로 살면서 예언자 이사야에게 조명된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으로 인해 탄성과 탄식을 동시에 토로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무궁무진하다. 그 속 안에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항복했던 일이 그 얼마였든지 모른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말했다. “예언자들이 계시를 보았다고 했을 때 그 계시는 하나님이 경험하신 인간의 내용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한 하나님의 내용이다.”(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예언자들』, 삼인, 2020, 600쪽) 예언자 이사야는 이 계시를 보여주신 하나님을 ‘숨어계신 하나님’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는데, 시인은 상현달에서 그 숨어계신 하나님을 보았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천재적 통찰인가! 시인은 연이어 상현달에 비친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대단히 명징한 시어로 이렇게 극대화시켰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저 능선 위에는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어서/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계속 연이어 9쪽에서) 시인이 표현한 사랑의 밀어를 읽고 있노라니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글로 전했던 복기해야 하는 한 구절이 병행되어 떠오른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19-20) 이제 한 詩節만 소개하고 나희덕이 준 감동을 마무리하려 한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28쪽) 시인은 이제 곧 닥칠 봄이 줄 소란함을 용서해 달라고 간(懇)한다. 너무 예쁘고 또 예쁘다. 선거철 시즌에 이제 거리를 누비며 악다구니를 칠 소란함이 아니다. 새로운 생명의 움틈 때문에 들리는 소리다. 이 소리는 행복하다. 그러니 독자인 나도 시인의 요청에 응하기로 한다. 許하노라. 얼마든지.
니희덕은 시집의 제목을 『어두워진다는 것』으로 정했다. 타이틀 시 제목으로 정했다. 어두워진다는 단어는 대단히 많은 메타포를 머금고 있는 표현이다. 시집을 접하면서 평자인 나는 시인이 정한 ‘어두워진다는 것’을 긍정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어둠을 부정의 어휘가 아닌, 품음(EMBRACING)으로 이해했기에 그렇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나날이다. 동서남북이 다 그렇다. 호흡하기도 쉽지 않은 울타리가 쳐져 있는 오늘을 사는 모든 이가 시인의 시어들을 접해보았으면 좋겠다. 상투적이며 감상적인 위로가 아닌, ‘품음’이라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기에. 시인이 건강하기를 화살기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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