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워킹 위드 지저스2024-06-11 10:20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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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판임
ㆍ출판사 동연
ㆍ작성일

 2022-11-28 10:04:39

 

김판임 교수의 ‘워킹 위드 지저스’(동연 간)를 읽고



“필자는 『예수』, 『역사적 예수』, 『예수의 비유』 등의 책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미국 가톨릭 학자 크로산이 말하는 혁명가 예수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파악한 대로 예수는 시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세상을 전복하려고 시도했다기보다는 이미 세상은 변하고 있다고,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 하에 행동했다. 이미 전복은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일이기에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다. 혁명을 시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알린 예언자이고,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득권자들에게 배척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외로웠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파악하고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다.”(p,230)

아마도 저자가 이 책 전체에 실은 20개 꼭지의 아티클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바로 이 것이지 아닐까 싶어 전술했다. 본서는 저자가 기독여민회의 소식지인 『기쁜 소식』에 연재한 성서마당 글말 20개를 묶은 책이다. 각 꼭지마다 신약학자인 저자의 신학적 성향, 즉 진보적인 스펙트럼으로 본 성서 해석이 돋보인다.
몇 가지만 추려본다. 두 번째 꼭지다.
마가복음 1:17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이 구절을 소개한 저자는 불트만이 썼던 愛用語를 하나 소개한다.
“Anrede, Rede는 ‘말’이라고 변역하지만 Anrede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An은 전치사로 ‘〜에게’로 이해하면 옳을 것이다. 불트만 저서를 힘써 번역했던 허혁 교수는 고민한 끝에 ‘걸어오는 말’이라고 번역했다. 걸어오는 말이라, 불트만 같은 학자는 사람의 인생이란 걸어오는 말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p,35)
베드로와 안드레는 부르셨던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하명했다.
“나를 따르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이 단발마적인 한 마디에 담긴 신학적 함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풀었다.
“기존의 삶을 단절시킴과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함”
명쾌한 통찰이다.
잠시 저자의 해제에 멈춰 섰다. 목사로 사역하기 위해 신학교 문을 노크한지 40년이 넘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목사라는 이름으로 사역한지 꼭 30년째다. 그렇게 사역자로 서서 달려온 세월,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어야 하는 것이 목사의 길이라고 치부해도 말 그대로 버티고 달려올 수 있었던 가장 큰 기저는 주군께서 시분초마다 행하셨던 ‘Anrede’ 때문이었다는 것을 조금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걸어오는 말 때문에 ‘무감각해지려하고 안전해 지고 싶어 하는 방어기제의 기존의 삶을 단절시키는 일과 싸웠고 또 ‘Anrede’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내려고 치열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치열함 때문에 주님을 따랐다. 다시 강조하지만 저자의 해제는 선명한 통찰이다.
저자는 9번째 꼭지에서 마가복음 8:18절을 풀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리스적 사고는 ‘봄으로 인식하기’인 반면, 유대적인 사고는 들음으로 인식하기라고 진단한다. (pp,127-132.)
눈여겨보아야 할 해석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의 인식 방법과 더불어 한 가지를 더 첨가하였는데 봄과 들음을 기초로 한 기억에 담지하기를 해낸 주군임을 천명했다는 점이 내게는 탁월한 해석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필자는 현장 목회자로 30년을 살면서 봄과 들음, 그리고 기억하기라는 신 존재에 대한 인식을 비롯한 일체의 종교적 엔카운터를 목도하며 현장에서 부대꼈다. 그러기에 주관적이라고 비평해도 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더 진하게 애착이 가는 필드가 있다. 바로 들음이다. 그리고 보면 필자는 히브리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에 ‘안레드’하시며 말로 걸어오신 하나님, 모세에게 동일하게 교제하셨던 하나님, 엘리야, 예레미야, 미가와 같은 흉 예언자에게 동일하게 ‘안레드’ 하셨던 야웨 하나님의 일하심은 맥이 통한다. 주목할 것은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들음의 영성이 있는 자가 하나님은 인식했다는 점이다. 전적으로 주관적인 접근이라는 것을 전제하며 말하고 싶다. 필자 또한 듣기 위해 치열하게 산다. 그리고 살 것이다. 들음으로 기억에 담지 하는 것만으로도 내 목회는 충분하다. 제천에 배론 성지라는 가톨릭 성지가 있다. 그곳에 있는 배론 성당을 가끔 찾는다. 정말로 아이러니한 것은 난 그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야웨의 소리를 곧잘 듣는다는 점이다. 개신교 목사가 교회가 아닌 성당에서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고 타박해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로 걸어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저자가 제시한 이 은혜 속에 빠진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화자와 청자의 구분이 명학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하시는 신에게 귀 기울이며 그의 백성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중략) 기록된 문서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 들었다.”(p,131)
금년 초에 한희철 목사의 이 단상을 책으로 만났다.
“다가온다는 태풍 앞에서도 거미가 저리 태평인 것은, 태풍의 위력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촘촘하게 거미줄을 치면서도 실상은 비워놓은 구석이 더 많다. 그것이 비를 견디고 바람을 견디는 길임을 거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다가온다는 태풍 앞에서도 거미가 저리 태평인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한희철, “하루 한 생각”, 꽃자리, p,336)
아름답다 못해 시리도록 감동적인 이 글을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필자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눈으로 보았는데 나는 이 글을 야웨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이렇게 들었다.
“너는 내가 믿는 구석이니?   
12번째 꼭지를 나누어보자.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막 10:23)
저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을 토대로 이렇게 직격하며 한국교회를 비판했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예수의 사상과 완전 거꾸로 가고 있다.”(p,159)
그러니 산헤드린 공의회 체제의 스펙트럼으로 볼 때 예수는 대단히 불온한 불순분자다. 한 동안, 한국교회에 청빈론과 청부론 폭풍이 불었다. 대다수의 중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이 돌풍에 열광했다. 숨을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부에 대한 교묘한 미화에 넋이 나갔다. 돈으로 세워가는 왕국의 위대함은 영적인 것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좋은 실례였다.
오래전 쟈크 엘륄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돈을 다른 권세와 함께 세속화한다는 것은 그에게서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세속화는 거룩한 특성을 없애고 권세의 요소를 부수는 것이 핵심이다.” (쟈크 엘륄, “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p,126)
돈을 미화시키는 것은 성경 속에 기록된 거룩함 (필자는 언제나 이 거룩함을 분리됨, 구별됨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한다.)를 부수어 버리는 질 나쁜 행위다. 왜 주군께서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쉽지 않다고 했을까? 예수의 사상과 정반대 가는 길을 택한 카운터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누군가에게 들은 이런 글을 실었다.
“맞아 죽어도 좋으니 돈벼락 맞았으면 좋겠다.”(p,166) ㅎㅎ
교회도 예외가 아닌 것이 유감이다.
마지막으로 한 꼭지만 더 나누고 싶다.
마가복음 8:2절을 읽자.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복음서 중에 가장 원 텍스트라고 볼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칠병이어의 기적’을 묘사한 텍스트다.
저자는 달마누다로 가셔서 당신의 일을 행하셨는데 그곳까지 수많은 무리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함께 한 자들이 예수와 같이 머문 시간이 3일이나 되었다고 마가는 증언한다. 굶주려 있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이 제자들이 보고한 칠병이어를 축사하신 뒤에 약 4,000명을 먹이고 7광주리를 남겼다는 흡사 오병이어의 기적과 비슷한 이 텍스트에 대해 갈무리하며 이 기적의 원동력은 예수의 측은지심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스프랑크니조마이’ 그렇다.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측은지심으로 인해 모여 있는 무리들의 아픔을 동통(同痛) 하셨던 주님은 있는 무리들이 갖고 있었던 것을 찾아내보니 숨겨둔 음식들이었다. 본인들의 시장기를 때우기 위해 감추었던 것을 내놓자, 무리들이 서로 숨긴 것을 내놓았고, 이것이 기적으로 연결되었음을 적시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p,124)
100% 아멘 한다. 이것을 부인할 목사가 어디 목사이겠는가! 필자도 이 사실을 섬기는 교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며 실천한다. 또 다시 아멘 하며 저자의 일설에 동의한다.
그런데…
조금은 아쉽다. 나눔이 기적인 것은 안다. 또 그 기적이 진짜 기적인 것도 안다. 그런데 주님은 축사하신 것으로 끝인가? 진보적 성향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필자의 이 주장을 오늘 처음 읽은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 해방신학자 구스따보 구티에레스의 글에서 저자가 말한 칠병이어의 신학적 해석을 오병이어 해제에서 읽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인가? 그분은 초자연적인 능력(물론 하나님의 일하심이다.)으로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그 일하심은 복음서 기자들의 인위적인 만들어냄에 지나지 않는 일인가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모교에서 강의하는 후배 교수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은 합리적 진보주의자이십니다.”
싫든 좋든 많은 지인들이 필자를 이렇게 몰아간다.
합리적으로 학문의 진보성을 가지려는 필자가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게 한 동기 부여인 것은 믿지만, 주님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는가? 그 분의 신적 능력의 일하심은 정말로 0%인가?

서평을 마친다.
저자는 내게 공부할 도구를 주었다. 기도원에서 머무는 동안 저자 때문에 행복했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투병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역자들에게 부스러기를 던져 준 저자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쾌유를 기도한다.
 

2022년 11월 28일 오전 9시 58분 이강덕 목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