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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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김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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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1-02 10:4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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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사물의 소멸”(김영사 간, 2022년)을 읽고 “첫 출발이 좋다. 아니, 행복하다. 목사로 사는 내게 생각이 진부하다고 공격하는 일체의 저 치들에게 한병철이 대신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꼰대적 기질이 꼭 나쁜 건만은 아니야! 들어보라고, 쫌!”
독서를 마치고 책 후면에 기록한 사족이다. 오랜 전 니콜라스 카의 솔직 대담한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쳤다. IT 미래학자로 손꼽히고, 인터넷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구글의 온 세상에는 깊이 있는 읽기를 위한 생각에 잠긴 침묵이나 명상의 애매모호한 우회성이 발 디딜 틈이 거의 없다. 모호함은 통찰력을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고쳐져야 할 버그다. 인간의 뇌는 더 빠른 프로세스와 더 큰 하드 드라이브, 그리고 사고의 과정을 조종할 수 있는 더 나은 알고리즘이 필요한 구식 컴퓨터에 불과하다.” (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청림출판, p,255) 같은 맥락이다. 한병철도 책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도전한다. “우리는 이제 땅과 하늘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구글 earth와 구글 cloud에 거주한다.” (p,11) 저자는 구글 어스와 구글 클라우드에 거주하는 新 백성은 그 공간에서 주는 정보라는 놀람과 흥분(Reiz)을 먹고 사는 백성들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손에 잡히거나 또 사물처럼 확고한 것이 아니라 정보에 의해 지휘 당하는 노예와 같은 일상에 묶여 있다는 비판을 가한다. 그 실례로 알고리즘에게 당하는 폭격이다. “알고리즘이 조종하는 세계 안에서 인간은 행위 능력을, 자율성을 점점 더 잃는다. 알고리즘들의 결정들을 따르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p,16) 필자는 블로그 하나를 운영한다. 대체적으로 칼럼과 설교 원고, 그리고 일상에서 느끼는 담론들에 대하여 현장 목회자로 살고 있는 내 성찰을 남기고 싶어 블로그 안에 글을 게재한다. 특히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원고를 올릴 때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일반 설교 원고는 한 달에 조횟수가 100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단히 우려스러운 것은 절기 설교, 예를 들자면 추수감사주일, 성탄주일, 대림절 등등의 부제가 붙은 설교 원고에는 조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지방 소도시에서 목회하는 이름 없는 목사의 설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네티즌들이 절기 설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원고에는 벌떼 같이 몰려드는 이유는 알고리즘이라는 수단을 통해 낚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대단히 무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정보의 위력이라는 차원을 넘어 ‘호모 사피엔스’인 생각하고 성찰하는 인간이 이제는 디지털 토피아의 세상에서 휴대폰 안의 정보라는 새로운 빅 브라더에 의해 놀림당하는 ‘포노 사피엔스’(니체는 이 단어를 예견했다는 듯이 마지막 인간-letzer Mensch이라는 차원에서 오락이라는 노동을 통해 쾌락을 추구한다고 했다.)가 되어버린 적나라한 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기에 그렇다. 저자는 이런 현상의 가장 경악할만한 재앙을 인간이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게 해 준 사물인식에서 붕괴되어 사물이 소멸되는 재앙으로 연결한다. 비근한 한 예를 든다면 필자와 연관된 가십을 언급할 수 있다. 필자의 서재에는 약 3,500권 정도의 종이책이 있다. 신학교 학부 시절, 점심 식권을 아껴 산 누렇게 변색된 종이책들까지 서고에 비치되어 있는 종이책은 내게는 보물이다. 하지만, 필자의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은 필자가 보물처럼 여기는 종이책에 별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e-book 이라는 구세주가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포노 사피엔스’의 부류다. 손가락질 몇 번으로 아버지가 어렵게 만들어 놓은 파일의 자료들을 눈에 펼쳐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종이책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면 질색한다. 뭐, 그러려면 그러라 라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의 방법이 고리타분한 아날로그라고 평가할 테니 충분히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종이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발터 벤야민 말 그대로 “소유라는 것이 사람이 사물과 맺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라는 말에 100% 동의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필자가 포노 사피엔스가 되지 않기 위해 최소의 고집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 독자들은 여겨주기를 바란다. “책장 넘기기에는 촉감이 깃들어 있다. 촉감은 모든 관계의 본질적 요소다. 신체적 접촉이 없으면 결속이 발생하지 않는다.” 지난 세월 필자가 읽었던 종이책을 펼칠 때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는 글감들을 다시 되새기면 나는 orgasm of reading 에 빠지곤 한다. 이걸 빼앗길 수 없다. 저자가 일갈한 디지털화의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에 대한 명쾌한 해석은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우리의 지각을 그 장치에 위임한다. 우리는 그 화면을 통해 실재를 지각한다. 그 디지털 창은 실재를 정보로 희석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등록한다. 실재와의 사물적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재는 ‘지금 여기에 있음’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실재의 ‘물질적 울림’을 더는 지각하지 않는다. 지각은 탈신체화된다. 스마트폰은 세계를 탈실재화한다. (중략) 스마트폰은 우리를 조종하고 프로그래밍한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우리를 사용한다. 참된 행위자는 스마트폰이다. 우리는 이 디지털 정보원에게 내맡겨지고, 스마트폰의 표면 너머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우리를 조종한다.” (p,41) 아주 빈번하게 필자가 느끼는 섬뜩함을 저자는 무섭도록 시린 언어들을 동원하여 대리적으로 강타했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다가 톨게이트를 지나친다. 그때마다 자동화 되어 있는 톨게이트 시스템을 지나가면 차 안에 있는 하이패스에서 친절한 여성의 멘트가 들린다. “정상적으로 결재되었습니다. 잔액은 〇〇입니다.” 너무 편리한 시스템이다. 자동차가 톨게이트에서 고속도로 통행료를 지불하기 위해 멈추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나는 지나갈 때마다 서글퍼진다. 고속도로 수금을 하는 사람과의 단절이 왠지 기계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신–1984’에 살고 있는 백성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 있음’을 느끼는 진한 감동이 박탈되고 있다.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끈적거림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나와 그것’만이 살벌하게 노려보는 세계에 살고 있어 숨 막히는 듯하다. “인간됨은 존재의 의인화요, 의미 없이 주어진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변질시킴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 연구소,p,124) 헤셀의 말을 매장한 시대가 디지털을 성물로 숭배하는 세상이다. 저자는 이렇게 폭격했다. “디지털이 성물로 숭배되는 시대에 정보로서의 실재는 ‘사랑하기’의 질서가 아니라 ‘좋아요’의 홍수가 세계를 삼켜버린 시대다. 모든 집약적 경험에는 타자의 부정성이 깃들여 있다. ‘좋아요’의 긍정성은 세계를 ‘같음의 지옥’으로 바꿔놓는다.” (p,89) 같지 않은 일체의 것들을 ‘그것(es)’이라고 갈라치기 하여 용서하지 않는 디지털화 시대, 어떻게 하든 ‘좋아요’를 압박하여 같게 만드는 디지털 전체주의가 어느 새 ‘나와 너’를 장악했다. 저자는 이런 시대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는데 천재적 표현이다. “깨짐(Bruch)을 특징으로 가진 정보는 없다.”(p,90) 불온하게 들려도 어쩔 수 없다. 필자의 태생적인 본성이 그러니 공격해도 물러설 것 같지는 않다. 깨지지 않는 발전과 진보가 있나! 단언한다. 없다. 나는 많이 깨져본 경험이 있다. 정치적 주류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린치를 당했다. 심지어 확인사살을 당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대로 ‘깨짐’은 또 다른 진보를 약속하니 말이다. 북-리뷰를 2023년부터는 정말 짧게 쓰려고 다짐했다. ‘피로사회’로 시작하여 ‘시간의 향기’, ‘심리정치’를 만나면서 저자는 너무 행복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 보다 훨씬 더 지적으로 레벨업 되어 있는 저자를 통해 대리만족이라는 지적 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물의 소멸’은 아들에게 꼭 읽히리라고 전의를 불태운다. 사족 하나, 독자들에게 권한다.
15,800원, 김영사도 대단히 상업적이다. 800원을 붙였으니 말이다. 15,800원 투자하라, 이 돈으로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횡재를 또 다른 필드에서 경험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