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아이든 토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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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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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9-19 14:3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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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든 토저의 “임재 체험”(규장 간)을 읽고 지난 수요일 설교를 준비하는데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온통 머리가 새까맣게 정지된 느낌이 들었다.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한 글자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30여 년 간 설교를 해 온 목사지만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무기력이 엄습했다. 하던 설교 준비를 할 수 없어 정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가 3층이라 베란다로 나가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한 눈에 들어오는 제천 시내 전경을 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1-2분 정도 그렇게 모든 것을 정지하고 기도했다. “주님, 오늘 수요 예배 설교를 해야 합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 서재로 돌아와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았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성경 구절이 번뜩였다. “하나님이 이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세기 19:29) 소돔을 엎으실 때 롯이 극적으로 구원받았다. 부끄럽게 구원 받았다. 이 구절이 생각날 때 소름끼치도록 주의 성령께서 일하시는 임재를 경험했다. 특히 한 단어에서 전율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자카르)” 소돔 성에 거주하던 롯의 구원이 롯 개인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자카르’하심의 결과임을 그날 내게 주군은 조명하셨다. 그 조명하심을 말씀을 통해 체휼하실 때, 나는 주께서 내게 엄습하시는 강력한 임재를 경험했다. 익명의 그리스도들 중에 상당수 내게 이렇게 질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 임재가 무엇입니까?” 그때마다 조직신학적인 지식이 일천한 나는 그에게 궁색해 보이는 것처럼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말씀으로 나를 휘감는 충만함입니다.” 지난 주간, 토저가 쓴 ‘임재 체험’을 목욕탕에서 숙독했다. 원제가 이렇다. Man: The dwelling place of God 이용복 번역자는 이것을 ‘임재 체험’이라고 번역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거주하는 장소로 나를 제공해야 함을 역설하기 위함이리라. 사람마다, 성향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는 다르게 체휼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저가 이 책에 내가 천착하도록 만든 역동은 글 전체에서 대단히 의도적으로 임재를 말씀 임재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토저를 비평적으로 성찰할 때, 이렇게 말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⓵ 너무 보수적인 성향이 진하다. ⓶ 아주 가끔 근본주의적인 폐쇄성도 발산한다. ⓷ 지성적인 필드가 약하다. 토저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는 내리는 내가 이렇게 보았으니 진보주의자들이 토저를 어떻게 평가할지 눈에 그려진다. 그러나 토저에 대한 긍정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본인의 글과 말을 전개할 때 지독하리만큼 특별계시로 조명해 주신 성경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저의 글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특별하게 수준 높은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데에서 충격을 받는다. 나는 신학의 정규적이고 정상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공부를 받지 않고 목사가 된 사람들을 많이 안다. 우연치 않게 그들이 전하는 설교를 들을 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재앙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너무나 극단적인 묘사인지 모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토저의 글을 읽으면 대단히 예민한 비평적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데 그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숙연해 진다. 그럴 때마다 왜 그럴까를 많이 질문하는 편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답한 내용은 이것이다. 정상적인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그에게서 터져 나오는 사자후에서 지성적 영성으로 가득 찬 말씀의 엑기스를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 앞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결코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아니면 신비주의적인 말씀 해석이 아닌 균형 잡힌 말씀으로의 진입을 독려하는 건강성이라고.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전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그는 체험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 자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p,223) 얼마나 단순하게 또 생각하기에 따라 건조해 보이기까지 하는 발언인가! 그런데 나는 이런 발언에 열광한다. 내가 바보인가! 바보라고 공격해도 괜찮다. 한완상 교수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토저의 글에서 ‘하나님을 바로 보는 바보’로 살기로 결정한 그가 보이고, 나 또한 그런 바보가 된다면 전혀 개의치 않고 바보가 될 의향이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토저의 이 갈파가 크게 다가온 이유는 하나님을 목적 삼는 자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폭격한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못할 것이다.”(p,224) 오늘 주일 설교 시간에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촌철살인을 교우들에게 전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누가 인간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p,89.)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그가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의 존재 자체는 생각할수록 재앙이며 비극이다. 반면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그리스도인답게 존재한다면 그는 존재와 삶 자체가 최고의 복이자 희망이다.(제천세인교회 9월 19일 주일 오전 설교 원고 중에서) 적어도 나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압박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토저는 말한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p,101) 나는 이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가장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내려는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가까이 느끼는 사람이라고. Man: The dwelling place of God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강추의 마음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