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이희학 |
---|
ㆍ출판사 | 대한기독교서회 |
---|
ㆍ작성일 | 2021-09-17 09:24:28 |
---|
이희학의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행동(창세기 1-11장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간)”을 읽고 필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2020년 11월 4일부터 수요 예배 시간에 창세기 강해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 8장에 도착하여 서른여섯 고개를 넘어섰다. 주지하다시피 제목 설교보다 강해 설교는 더 많은 긴장을 요하고, 더불어 공부해야 하는 압박감이 배나 더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내게 그렇다는 개인적인 사견이다. 창세기 강해를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약 6개월 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구약을 전공한 친구 교수에게 강해에 필요한 참고 도서를 소개받아 적지 않은 도움을 얻고 사역을 시작했다. 약 10여권의 단행본 중에 강해의 일등공신의 책을 뽑는다면 단연 목원대 이희학 교수가 쓴 본서다. 강해를 위한 자료와 1-11장의 原歷史 공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필자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본서는 깊은 공부에 들어가게 해 준다. 몇 가지만 들춰 보자. 첫째, 구약 성서해석학의 가장 중요한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어원적인 주석이 눈에 띤다. 한 예를 소개해 보자. 저자는 ‘토우 바 보우’ 즉 혼돈과 공허‘에 대해 이렇게 주해한다. “혼돈과 공허는 혼잡하고 조잡한 땅의 원시적 상태를 말하는 단어들인데 혼돈(토우)은 구약에서 ‘황량한 땅, 사막, 황폐한 장소’를 의미하고(신 32:10, 욥 6:18), 공허(보우)도 역시 ‘쓸모없는 공터나 버려진 황무지’를 의미한다. (중략) ‘혼돈과 공허’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 이전 상태가 무질서의 비어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p,51.) 그의 해석은 ‘토우 바 보후’의 상태를 신학적으로 100% 적확하게 이것이라고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근접한 해석으로 정의한다면 무질서임을 시사한 셈이다. 이어지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여기서 흑암(호세크)은 어둡고 암울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깊음’(테훔)은 어둠이 덮여 있는 끝없이 깊은 혼돈의 원시 바다(시 104:6, 사 51:10)를 의미하는데 액체적인 원상태로 된 우주의 심연이다.” (p,52) 필자는 저자의 글을 읽다가 ‘호세크와 테훔’(흑암과 깊음)도 역시 무질서의 상태라는 해제에 동의하여 창세기 다섯 번째 강해 시간에 교우들에게 전했다. 신학교 시절, 성서원어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대가 때문에 때로 많이 움츠린다. 그렇다고 설교 준비에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저자와 같은 학자들의 선제적 공부에 힘입어 나에게는 2차 자료이지만 그들의 연구를 충실히 독서하며 2%의 부족을 채운다. 둘째, 신학적 집요함이 있다. 지난 주 수요일, 36번째 사역인 노아의 홍수가 그친 스토리에 집중하다가 저자의 주석에 무릎을 쳤다. 노아 홍수의 시작을 이렇게 갈파했다. “하나님은 모든 혈육이 있는 자의 행위를 심판하기 위해 태초에 묶어 놓았던 혼돈의 세력을 풀어 놓으신 것이었다.” (p,228) 필자가 이 해석에 긴장하며 머문 이유는 그 다음의 주해 때문이다. 저자는 노아 홍수의 끝을 계속해서 이렇게 풀었다. “하나님은 궁창 아래 있는 깊음의 샘과 궁창 위에 있는 하늘 창을 막으셨다. 온 땅을 뒤덮었던 혼돈의 세력을 저지시키고 더 이상의 심판의 물이 흘러나오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p,232) 웬만한 독자들이 주지하다시피 노아의 홍수는 앗시리아 홍수 버전으로 잘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를 연상하게 하는 데, 앞에서 소개한 저자의 신학적 작업이 고대 근동에 퍼져 있는 비인격적인 신들(gods)에 의해 잠식된 메타포적인 신화적인 메시지가 아닌 스스로 존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God)의 일하심에 대한 확장성을 견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셋째, 톨레도트를 통한 원역사 이해에 탁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본서의 pp,176-184의 지면을 할애하여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톨레도트를 세 가지의 틀로 해석했다. “⓵ A는 x세에 B를 낳았다. ⓶ A는 B를 낳고 y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⓷ A는 X+Y세를 향수하고 죽었다.”(pp,177-178) 저자가 이 형식의 틀을 제시한 이유는 가변적인 요소인 향수한 년 수에만 집중하는 전통적인 해석을 뛰어 넘어 불변적 요소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즉 제사장 문서(P문서) 기자가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10세대 걸친 톨레도트를 자세히 열거한 이유는 이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보여주신 신학적 의미로 창세기 1:28절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임을 들었다. 신선하고 탁월한 저자의 해석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고든 웬함이 창세기 1장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창세기 1장의 근본은 하나님의 유일성이다. (중략) 하나님의 유일성과 독특성의 필연적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이며, 이것이 성경 신학의 또 다른 근본적인 점이다.”(고든웬함, “성경전체를 여는 문, 창세기 1-11장 다시 읽기”, 차준희역, IVP, pp,138-139)
필자는 수요일에 유일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을 예배 시간마다 경험한다. 이 은혜를 받게 해 주는 일등공신은 창세기 연구를 위한 공부이겠지만, 그 지지자로 이희학 교수는 업어주고 싶은 선생님이다. 일면식이 없는 학자지만 이 지면을 빌려 감사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