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구약이 이상해요2024-06-11 10:04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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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차준희
ㆍ출판사 새물결플러스
ㆍ작성일 2021-11-30 07:58:01

 

차준희 교수의 “구약이 이상해요”, (새물결플러스 간)를 읽고


2013년 말에 펜실베이니아의 하트필드에 소재한 비블리컬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는 데이빗 램이 쓴 ‘내겐 여전히 불편한 하나님 (IVP, 2013년)’을 읽었다. 책에서 램 교수는 구약에 기록된 내용 중에 건드리기가 불편한 내용 8가지를 가지치기하여 구약학자로 나름 충실하게 답한 것을 보고 현장 목회자로 있는 나는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예로 구약에 그려진 하나님의 狀이 폭력적이라는 공격에 대한 반론이 인상적이었다.
엘리사가 벧엘로 가고 있는데 도중에 소년 몇이 와서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린다. 엘리사가 야웨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자 숲에서 곰 두 마리가 나온다. 곰은 소년들에게 달려들어 아이들을 찢었다. 독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런 구절을 들어 폭력의 정 중앙에 하나님이 있다는 논리로 하나님이 폭력적이라고 주장한다. 램은 반론한다. 소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카탄(23절), 엘레드(24절)’ 모두가 청소년 혹은 10대 후반을 상징하는 단어였다고 말한다. 엘리사가 놀림을 받은 것은 미취학 아동에게 놀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10대 후반의 무리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으로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는 싸움을 시작한 폭력배가 아니라 최소한의 자기를 방어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靈權을 받은 뒤 이스라엘을 위하여 해야 할 사명이 막중한바 그를 보호하셔야 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한 독자들의 곡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성경 본문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하나님은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사역자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최소한으로 일하셨던 하나님이었다고 진단했다.(데이빗 램, “내겐 여전히 불편한 하나님”, IVP, pp,113-118.)
그의 갈파를 머리에 새겼다.
우리 교회 교우 중 젊은 지체 한 명이 성경 공부를 하는 시간에 이렇게 도전적인(본인의 입장에서) 질문을 했다.
“목사님,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명령을 하실 때 어린 아이들을 포함하여 전멸시키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이 질문은 비단 내게만 질문된 내용이 아니라 목회자라면 누구든지 한 번 즈음은 받아 보았을 만한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은 필자를 비롯한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그 답을 제시할 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겠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2%가 부족한 답을 제시할 때가 있었음을 아마도 내심 느끼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21세기의 C S 루이스라고 불리는 석학 톰 라이트는 본인의 책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예수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다음을 직시하라. 여타 사람들이 복음서의 배후를 캐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비웃지만 반드시 복음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복음서가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해 주었으나 용케도 걸러 낸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필히 복음서 안으로 진입해야 한다.” (톰 라이트, “톰 라이트가 묻고 예수가 대답하다.”, 두란노, p,105.)
톰 라이트의 이 명쾌한 답이 어찌 신약성경에만 국한되랴 싶다. 구약 성경의 이해도 매일반이다. 아니, 어떤 의미로 바라보면 더 집요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친구가 책을 보냈다. ‘구약이 이상해요’다. 친구는 책을 보내며 점잖게 내게 협박한다.
“친구의 날카로운 북-리뷰가 두렵다.”
북 리뷰어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발언이다. 두려움의 립 서비스가 아니라 좋은 말로 할 때 서평 잘 써서 공개하라는 협박이다. 협박에 굴할 내가 아니다. (ㅎㅎ)
친구에게 책을 받고 약 1시간 30분 정도 시간을 할애해서 독서했다. 총 217페이지 정도가 되는 분량이라는 조금은 덜 부담스러운 면도 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독서하기가 수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저자가 쓴 이번 책에 대한 종합적인 평을 간단히 辯한다면 ‘구약이 이상하다’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쓴 저자의 의도가 있겠지만, 오히려 평신도들이 읽으면 아주 좋은 난제 구절에 대한 길라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평이함으로 서술되었다는 두드러진 장점이 보인다.
친구의 저서 중에 ‘구약사상 이해’(대한기독교서회, 2011)를 만났을 때, 그가 존경스러웠다. 같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같은 교수님들에게 같은 수업을 받고, 같은 채플에서 같이 예배를 통하여 영성도 키웠는데 저자의 지성에 따라갈 수 없는 차이 때문에 몹시 부끄럽고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이 부끄러움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친구의 지성을 따라잡을 수 없지만 그가 한국교회를 위해 뿌리고 있는 적지 않은 학문적, 영적 기여에 반만이라도 following 하다보면 그래도 공부하는 목사가 될 것 같아 필자 역시 헉헉 대며 따라가고 있다.
모세오경 안에 담겨 있는 23가지의 난제 담론이 책에 담겨 있다. 감히 말하건대, 단지 욱여쌈으로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고 난제 해석을 마구잡이로 한 해석한 천박한 해석서들이 즐비한데 친구는 보기 좋게 모세오경의 text와 구약성경을 둘러싼 context를 대단히 조화롭게 정리하여 오류로 해석된 전통적인 본문을 바로 잡아 놓는다. 뿐만 아니라 primary source 즉 성서 원어 해석에 천착한 본문 해석을 소개하고 있어 나처럼 secondary source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지한 목회자에게 신선한 해석의 여백을 던져준다.
저자는 필자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짧게 쓰라고 매번 잔소리를 한다. 해서 23개의 난제 중에 두 가지만 남긴다. 너무 잘 됐다.
하나는 박수, 하나는 갸우뚱하는 리뷰다.
박수부터 쓴다. 18장의 담론 ‘아사셀, 누구세요?’를 평해 보자.
레위기 16장에 서술되어 있는 아사셀의 염소 기사를 모르는 목회자는 아마도 없을 줄 안다. 주지하다시피 ‘욤 키푸르’의 날에 염소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속죄를 위한 제물로 드려진다. 두 가지의 예식이 진행되는 데 저자가 주장한대로 염소를 죽여 그 피를 뿌림으로 정결함을 이루는 정결례가 첫 번째 의식이고, 또 하나는 드려진 염소 중에 살아 있는 것은 정결례가 끝난 뒤에 안수하여 아사셀로 보내는 예식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의 예식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첫 번째 예식은 이스라엘 자손의 죄로 오염된 ‘성소의 부정’을 다루고, 두 번째 예식은 이스라엘 자손의 죄에서 야기된 ‘공동체의 의식’을 다룬다. 전자의 염소는 성소를 정결케 하기 위한 속죄제물이고. 후자의 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광야로 나가는 제물이다.” (p,170)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인지하고 있는 이 내용을 다시 정리한 저자는 특히 한 가지에 집중한다.
“레위기 16:8절의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는 표현에서 전제된 것 같이 아사셀은 ‘장소’가 아니라 어떤 ‘존재’를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아사셀은 누구인가? 고대근동에서 아사셀은 광야를 지배하는 ‘악령’, ‘광야귀신’의 이름이었다.” (p,171)
목회 31년 만에 처음 접하는 해석을 저자에게서 들었다. 필자가 인지했던 아사셀의 이해는 장소였다. 하지만 저자는 장소가 아닌 존재의 의미로 재해석한다. 나 역시 저자의 이 갈파에 한 동안 멈춘 이유는 scapegoat와 오버랩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사셀로 보내진 염소를 저자는 에두르고 있지만 왕대일 교수가 일침 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의 구절을 인용한 것은 아마도 저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卑下로 인해 이루어진 가장 위대한 감격인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 ‘아사셀’에 집중했던 나를 ‘아사셀로 보내진 염소’로 패러다임 쉬프트하도록 정신 차리게 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번엔 갸우뚱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기원론적인 서술 방식을 통하여, 야웨 하나님이 역시를 주관하고 계심을 고백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그대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인 가나안 민족(함의 후손)이 뒤늦게 그곳에 들어온 이주민인 이스라엘 민족(셈의 후손)과 블레셋(야벳의 후손)의 지배를 받는 것도,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그 땅을 독식하지 못하고 함께 공존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라는 것이다.” (pp,82-83)
저자의 이 지지 성명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창세기 9:25-27절에 기록된 창세기 기자 기록의 뒷받침이기도 하며 구속사적인 창세기 서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학자로서의 거룩한 고집이다. 복음주의 교단에서 목회하는 필자 역시 이 큰 그림을 부인할 리 없고, 창세기 편집자(특히 P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모를 리 없다. 허나 그렇다고 필자가 항상 염두 해 두고 있는 고민에 대하여 동의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수요 예배 시간에 창세기 강해가 진행되고 있다. 마침 전술한 창세기 9장 순서에 맞추어 설교를 준비하다가 주지시킨 이 대목 창세기 9:25-27절 강해의 진도를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 강해 설교 원고 작성 중에 나를 어렵게 한 대목이 이 부분이었다.
노아의 후손들의 톨레도트를 감안할 때 가나안은 원래가 함의 자손들이 차지하며 살았던 땅으로 보는 게 적어도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노아의 톨레도트 텍스트를 전제할 때 올바른 해석이다. 이런 측면에 비추어 볼 때 함의 자손들을 내쫓고 후에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한 셈의 후손들은 도리어 점령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와 살았던 함의 족속들을 내쫓고 점령군으로 가나안에 정착한 셈의 정착 역사를 창세기 편집자는 다분히 의도된 해석으로 정렬시키는 것이 맞는가에 대하여 긍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필자는 천착했다. 이런 경우를 역사는 승자를 중심으로 기록하려는 승자독식의 기술(記述)로 보아야 되지 않을까 자문했다. 고민 끝에 구약선생님인 저자에게 이 내용을 질문했다. 친구가 나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해 주었다. 요약해 본다.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의 주신 땅에서 살던 백성들 그러니까 창세기 10장의 내용으로 접근할 때 함의 후손들이다. 이 땅에 살던 백성들이 부르던 신의 이름은 ‘엘’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엘’은 고대근동의 일체의 종교들에서 흔히 호칭되던 일반적 신의 명칭이었다. 이 호칭은 함의 후손들이 즐겨 쓰던 언어다. 반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을 정복하여 정착하게 된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서부터 비로소 성경이 말하는 야웨의 이름이 불러졌음을 강조했다. 결국 야웨 신앙의 시작은 가나안을 정복한 셈의 후손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친구의 조언이었다. 그러므로 야웨 하나님의 신앙을 계승하는 기독교 신앙인의 자세는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이 미리 약속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신앙적 태도라고 친구는 충고해 주었다.
신앙적으로 친구의 충고와 답변을 이해하고 동의한다. 허나 종교사학적인 측면에서 지지는 난처하다. 이 내용을 강해해야 하는 목사로서 고민하다가 저자의 가르침을 교우들에게 전하고 또 다른 하나의 메시지를 전했다. 왜냐하면 창세기 9:25-27절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이 해석이 나를 더 많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창세기 기자는 이 이야기(창세기 9장의 톨레도트)를 통해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의 조상이 이미 오래 전에 저주를 받았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가나안 정복에 나서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함인 듯하다.” (송병현, “엑스포지맨터리 주석-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p,203.)
설교자와 해석자의 신학적 차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마무리하자. 본서 뒷면에 꼼꼼하게 서비스 해준 참고 문헌이 등재되어 있다. 면면을 살피다가 친구에게 또 다시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소개된 참고문헌이 적어도 내게는 너무나도 행복한 구약 공부의 자료들이기에 말이다. 차준희 교수가 자랑스럽다. 내 친구인 것이.
 

ps: 차 교수에게 며칠 전, 전화를 했다. 연세신학백주년 기념주석이 출간되었는데 친구가 맡은 책인 전도서가 아직 출간되지 않아 채근했다. 빨리 쓰라고. 찐 팬이 기다린다고. 가만히 보면 나 또한 친구에게 시어머니의 한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친구의 페이스북이나 다른 SNS를 보면 차준희 왕국이 건설된 듯한 모습이 보인다. 야당이 한 보인다. 그래서 야당 역할을 나라도 해야겠다. 끝까지 교만하지 않도록(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