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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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흐름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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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12-01 16:1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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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의 ‘믿는 인간에 대하여’(흐름 출판 간)를 읽고 시즌제로 방영된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시청했다. 필자가 시청했다는 말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투자를 했다는 말이다. 텔레비전 시청을 거의 하지 않는 나에게는 큰일이기 때문이다. 왜 슬생에 필이 꽂혔을까? 간단하다. 좀 이렇게 따뜻함이 휘감는 세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내게 스멀댔기 때문이다. 시즌제 드라마였기에 속편 즉 두 번째 시즌 방송을 본 뒤의 소감을 잠시 말하고 싶다. 신원호 PD의 연출력이야 이미 정평이 나 있는바 그의 시즌 2 역시, 드라마의 디테일한 묘사들을 보면서 프로가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한 번 느끼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이우정 작가에 대해서는 조금은 시니컬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슬생’의 태생적인 한계를 엿 보게 해 준 그녀의 어록이 있다. “세상 모두가 좋은 사람이면 좋겠다.” 그래서 그랬나, 시즌 1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동의 여운이 진하게 밀려왔는데, 시즌 2에서는 시즌 1의 성공에 대한 긴장감, 압박감이 작가를 옥죄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휼하게 하는 만들어낸 감동, 혹은 작위적인 감동이 많이 보여 조금은 불편했다. 아, 물론 이 작가의 분투를 폄훼하려는 멘트가 아님을 전제한다. 그녀는 최고의 작가임에 틀림없다. 속편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장르다. 한동일의 시즌 1은 ‘라틴어 수업’이다. 한동일이 왜 한동일 인지를 알게 해준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해 낸 것이 라틴어 수업이다. 지난달에 그의 시즌 2를 읽었다. De Homine Credente (믿는 인간에 대하여)다. 종교성이 농후한 제목이자 글이기에 추측건대 시즌 1에 비해 참담한 성적표를 거둘 확률은 100%다. 예언하건대 시즌 1에 비해 작가가 경험할 충격에 삼가 애도를 표한다. 하지만, 목사인 나에게는 시즌 1보다 속편 시즌 2가 더 크게 공명되어온다. 같은 동종업에 종사해서 그런가 보다. (ㅎㅎ) 목사로 현장에서 사역하는 필자는 펜데믹 2년이라는 세월이 준 깊은 상처(profound scar)를 굳이 드러낸다면 ‘믿는다’라는 단어를 부끄럽게 한 역동들이라고 진단하고 싶다. 왠지 모르게 펜데믹 하에서 교회는 불온한 집단의 상징으로 부상했고, 교회라면 진저리를 치는 자들이 눈에 더 많이 보이고, 현장 목사로 지난 2년을 살면서 가장 많이 힘들게 했던 것은 교회 안에 있었던 자들의 무너짐을 목도해야 했던 점이다. 지금 섬기는 교회의 신자들 중에도 약 30% 정도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살았지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급전직하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것을 목도하고 있는 목사는 아파서 멍이 들 정도다. 하지만 어쩌랴! 펜데믹 상황의 실체가 이런 운명을 담보하고 있으니. 작가는 책에서 19가지의 ‘믿는 것’에 대한 담론을 현재적인 용어로 풀어내려고 애썼다. 수년 전, 김기석 목사가 쓴 ‘아슬아슬한 희망(꽃자리 간, 2014년)’을 추천하는 상찬 글에서 손석춘 기자가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어로 하는 가장 아름다운 설교” 그가 이렇게 김 목사의 글을 珠玉이라고 평한 이유를 계속해서 이렇게 펼쳤다. “김 목사는 엉뚱하게도 가끔 지렁이를 질투한다. 지렁이는 나뭇잎, 풀, 쓰레기 등 버려진 유기물을 제 몸무게만큼 먹어치우는 생태계의 청소부이다. 해로운 미생물을 제거하고 기름진 분변토를 내놓아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 그런가 하면 흙 속에 길을 내서 토양에 공기와 수분이 드나드는 통로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지렁이를 닮을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일상의 모든 것들을 내 속으로 끌어들여 정화한 후 그것을 선물로 내놓을 수 있을까? 지렁이를 보며 삶을 수업하는 목사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김기석, “아슬아슬한 희망”, 꽃자리, pp,5-6.)
한동일은 본서에서 인간이 믿는다는 것에 대한 서술을 본인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구현해 내려고 노력했다. 저자의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무신론자이자, 세속적인 가치에 매몰된 사람들이기에 시즌 1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작가로서 대단한 crisis를 안고 모험한 셈이다. 총 19가지의 담론을 라틴어에 담긴 촌철살인들을 인용하며 풀어낸 ‘믿는다는 것’에 대한 그의 충성스러운 고언은 귀에 담을 만하기에 충분하다. 왜,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선언한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일설 하고자 한다.
O vos omnes qvi transitis per vim, attendite et videte si est doros sicvt doros mevs.
번역하면 이렇다.
오,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여, 나의 고통과 같은 아픔이 있다면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저자가 이 문구를 소개한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다는 ‘비아 돌로스’ 즉 ‘십자가의 길’의 초입 벽면에 이 글귀가 쓰여 있음을 공유하고 싶어서였다. 특히 한동일은 이 문구 중에 ‘videte’ 즉 ‘보다’라는 단어에 천착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비데테’는 능동적인 바라봄이라고 갈파한다. 예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보기를 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어조로 ‘보라’고 압박한다는 점을 저자는 ‘비데테’에서 찾는다. “‘보다’는 생각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능동적으로 열려 있는 동사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우리는 스스로 알 수 있지 않을까요?” (p,45) 왜 우리 시대가 아픈가! 능동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주마간산의 모습으로 타인을 보며 외면한다. 무관심한다.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에게 베드로와 요한의 던졌던 일성이 이것이었다. ‘우리를 보라’고 선언했던 사도행전 3:4절의 ‘보라’는 명령은 ‘블레포’ 즉 주목해서 보라는 ‘look at’의 압박이었다. 이 선언이 떨어지자 앉은뱅이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생각하여 다시 그들을 쳐다보았다고 기록한 사도행전 3:5절의 동사 ‘에페코’는 정신 차려 본다는 ‘give attention to’의 의미의 봄이다. 나의 주군이 너와 나가 보기를 원하셨던 ‘봄’은 ‘블레포’요 ‘에페코’임에 틀림없다. 교회여, 크리스티아노스여! 무얼 보고 있나? 본질인가, 비본질인가?
L’abito non fa il monaco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
저자는 이 문구 뒤에 다음을 부연한다.
“즉 수도복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 수도자가나 성직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옷 자체가 그 옷이 지향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따르는 인간은 그 믿음으로 예배하고 경배할 공간을 더 화려하게 만들어나갔지만, 그 안에 머무는 인간은 그 예배의 공간만큼 대단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았나 봅니다.”(p,121)
연대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과정 코스워크를 이수할 때, 김중기 박사의 수업을 듣다가 선생님께서 목사들인 학생들에게 전했던 메시지를 가슴에 담았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직격했다. “여러분,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목회학박사를 취득하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삽겹줄 가운을 입게 될 것입니다. 수업 중이니 여기에서 부탁하나 하십시다. 졸업을 할 때 입을 박사 가운은 졸업식 때만 입고 장롱에 쳐 박아 놓으세요. 제발 부탁인데 박사 가운 걸치고 강대상에 올라가 설교하면서 폼 잡지 마세요. 그건 이런 뜻이에요. 나는 똘아이입니다, 나는 무식한 놈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를 하는 그런 개그가 어디에 있어요. 목사가 입을 옷은 유일하게 로브(robe)이어야 합니다. 로브(수도복)는 죽겠다는 결의로 입는 옷이에요.” 곁들여 한 가지를 선생님은 덧붙이셨다. “당회장실에 담임목사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명판을 세워놓잖아요. 이렇게 ‘Senior pastor’ 아무개, 무슨 뜻인가 하면 ‘늙은 목사 아무개’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늙은이 취급을 빨리 당하고 싶어요. 미국에서는 담임목사를 ‘Senior pastor’ 라고 부르지 않아요. 미국에서는 담임목사를 ‘Pastor in charge’라고 불러요. ‘책임 맡은 목사’라는 의미로.” 선생님의 가르침이 이미 오래된 가르침인데도 이후 필자는 가슴에 늘 담고 살아간다.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역발상으로 박사 가운이 아닌 수도복(robe)을 입을 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라지도록 움직이지 않을까 싶어 강조하고 싶다. 수도복은 입으라고.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저자의 이 일갈은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정답이다. 이처럼 명쾌하고 선명한 명제가 또 어디에 있나 싶을 정도로 무릎을 쳤다. 그런데 실상이 어떤가? 자꾸만 신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채근하는 신으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일련의 이런 현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신의 옹졸함과 편협함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색에 맞추어서 신이 요리되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기형적인 현상이다. 이 시대의 정황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요,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신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옹졸하고 속 좁은 또 다른 ‘인간’처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pp,241-242.) 혹여나 한국교회의 현장이 출애굽기 32장의 현장이 아닐까 싶어 두렵고 떨린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지만 한국교회의 강단에 혹여나 금송아지가 세워져 있지 않을까 심히 두렵고 두렵다. 기대하기는 변질되어 있는 신(하나님)의 자리를 되찾아 드리자. 어떻게 그 자리를 드릴지 사랑하는 친구의 역설로 답해 본다. “야웨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자기 백성과 함께 하며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시다. ‘예흐에 아쉐르 예흐에’ 즉 ‘나는 너를 위해 현존한다.” (차준희, “구약이 상해요, 새물결플러스, p,88.) 신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분은 예흐에 아쉐르 예흐에 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3쇄를 찍었다. 시즌 1에 비해 참담한 성적표이다. 하지만 필자는 ‘라틴어수업’보다 ‘믿는 인간에 대하여’ 가 더 절실했다. 저자여, 위로를 받으시라. 나 같은 독자가 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