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동기회에서 연락이 왔다. “이 목사, 차준희 박사가 『예레미야의 영성』 출간하고 동기들에게 헌정했는데 임원회에서 3월 20일에 북콘서트 열어주기로 했다. 논찬(論贊)을 신학자 한 명, 동기 목회자 한 명, 총 두 명이 하기로 했는데 임원들이 너를 논찬자(論贊者)로 뽑았다. 무조건 순종해라.” 고사할 여유도 주지 않고 거절해야 씨도 안 먹힐 것을 알기에 압박하는 친구들에게 순종하기로 하고 작년 연말에 읽은 책을 다시 손에 들고 지난 주간 두 번째로 친구의 책에 시선을 돌렸다. 2018년부터 5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그중에 두 번에 걸쳐 졸저에 추천사를 써준 이가 차 박사이기에 꼼짝없이 동기회에서 계획한 북콘서트에 논찬자로 나서야 하는 부담을 지니게 되어 이제는 서평(book-review)을 써야 하는 숙제를 안았기에 두 번째 읽는 독서 시간에는 비평적 입장에서 심도 있는 독서에 다시 임했다. 차 박사는 사석에서 내 책에 대한 잔소리를 많이 한 친구다. 제일 많이 들었던 잔소리는 글을 짧게 쓰라는 시어머니 잔소리였다. “네 글 읽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글감을 놓칠 수 없어 안 읽을 수는 없어 네 글은 빼놓지 않고 읽는데 숨차다. 제발 글 문장 좀 짧게 써주라. 부탁이다. 글 읽다가 졸도하겠다.” 이렇듯 웬수 같은 잔소리를 수도 없이 늘어놓은 친구가 쓴 책에 대해 이번에 내가 논찬을 맡게 되어 칼을 갈고 있다. “차준희 박사가 신학의 여정 중에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신학 여정을 마무리하며 내놓은 역작 『예레미야의 영성』을 읽다가 순교하는 줄 알았다. 책의 분량이 총 645페이지에 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2025년, 645페이지 분량의 책은 정신 나간 자가 아니면 절대로 읽지 않는다. 저자는 참 담대하다. 순교의 영성을 갖겠다는 의지가 없는 한 절대로 읽지 않을 책을 출간했으니 참 대책 없는 인물이다. 독자들이여, 순교에 참여할 용기가 있으면 『예레미야의 영성』에 도전하시라!” 제가 발표할 논찬 글의 말머리에 담은 글이다. 보기 좋게 웬수 갚을 문장이다. 이렇게 야단만 치면 절교한다고 할 것 같아서 이 글을 비롯해 몇 가지를 담을 예정이다. 그중에 정말로 격려하고 칭찬하고 싶은 이 문장은 꼭 담을 예정이다. “『예레미야의 영성』은 이제까지 출간된 예레미야 예언서 중에 기념비적 자료가 될 수 있는 수작이다.” 나는 구약 성서신학자들이 야심 차게 내놓은 예레미야 예언서에 관한 도서를 빼놓지 않고 읽었다. 정말 수준 높은 책들이다. 읽으면서 너무 귀한 공부를 하도록 도와준 책들이었기에 지금도 예언서 예레미야를 본문 텍스트로 삼아 설교 준비를 할 때, 빼놓지 않고 인용하는 자료로 서고에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책들을 진열해 놓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이들 책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아쉬움은 ‘SO WHAT?’의 불편함이다. 그리고 설교자만이 느끼는 건조함이다. 성서학에 대한 박사학위가 없는 내가 구약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성서 해석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시건방진 일이다. 마치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예레미야 예언서 텍스트를 기초로 해 회중들에게 전해야 하는 콘텍스트로 그 외연을 확장할 때는 내 입장은 돌변한다. 그건 신학자들보다 목회자가 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차 박사가 출간한 책을 극찬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신학자가 본 예레미야 예언서에 대한 대단히 치밀한 석의적 해석(Exegetical interpretation)과 더불어 본문을 현장화시킨 해석(Contextual interpretation)이 병행된 걸출한 책이기 때문이다. 책의 면면에 친구가 보여준 이런 차원의 균형적 해석이 돋보인다. 참 뛰어난 재능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교차점에서 조명하시는 성령의 ‘레마’를 ‘다바르’화 시키는 차 박사는 뛰어난 돌연변이다. 그러니 645페이지라는 미친 분량이지만, 이 책은 순교 당해도 좋을 만한 책이다. 친구의 정년이 이제 네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어 매우 아쉽다. 모쪼록 친구가 끝까지 건강하기를 화살기도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