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6월 11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5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좋아하는 음식 만들기 레시피 공개하기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337장)
●  복음성가: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이것만 있다면
● 본문 : 창세기 31:1-16
1) 야곱이 라반에게 제안했던 생뚱맞은 요구의 프로젝트가 하나님의 작품이었다는 의미는?
본문 7-12절을 참고하자.  

2) 야훼 하나님이 야곱과 맺은 언약과 그 언약의 재확인에 대해 말해보자.
본문 13-14절을 참고하자  

3) 적용하기
⓵ 천로역정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무기는?
⓶ 나는 어느 때에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는가?
⓷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제목
⓵ 지역 셀에서 중보 하는 태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⓶ 이번 주간에 있을 환우들의 치료 과정을 위하여 중보
⓷ 여름 사역(성경학교, 수련회 등등)을 위해 중보하기
⓸ 담임목사의 안식주간을 위해 중보하기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선정된 태신자들의 이름 중보 테이블에 올려 공유하기
2. 섬기는 피선교지에 전화해서 격려하기
3.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하기
4. 담임목사 안식 주간, 한 번씩 교회 들려 돌보고, 기도하고 가기
5. 수요 예배 지체들 독려하여 참석하도록 인도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본문 1-2절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 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이 구절을 파고 들어가면 라반과 그의 아들들의 행동은 대단히 폭력적인 처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14년 동안 노동력을 착취했던 라반이었기에 살 길을 찾아야 했던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에게 흰 양과 흰 염소 외에 변종의 양과 염소 새끼들을 낳으면 자신의 소유가 되게 해달라는 협상을 했고, 결국 낳은 변종들에 대한 가축만을 계약대로 가졌건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을 못내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않는 적반하장의 심리적 폭력을 야곱에게 가한 것입니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변종 염소와 양 새끼들이 탄생하지 못하도록 모든 물리적 조치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반의 재산이 되는 허약한 흰 염소와 양들에 비해, 야곱의 재산이 된 변종들은 튼튼한 것들이 태어나 야곱은 급기야 6년 만에 거부가 된 것입니다. 이를 시기하는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야곱이 갖고 있는 재산들을 탈취하거나 아니면 급진적으로는 야곱을 살해하여 그의 재산을 편취할 지경까지 이르렀음을 본문이 긴장감 있게 소개합니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야곱은 드디어 본인의 결심을 굳히고 20년간의 하란 즉 밧단아람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취득한 재산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귀향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 사실을 아내들에게 통보하는 4-10절까지의 본문은 지난 14년은 물론 이후 재산을 형성하기까지의 6년의 삶을 반추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장황하기는 했지만 야곱이 아내들에게 밧단아람을 떠날 것에 대한 의지를 비추자, 남편의 말을 다 듣고 난 라헬과 레아의 반응을 본문 14-16절에서 독자들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라헬과 레아는 야곱과 결혼 한 것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은 없어 보이지만, 과정에 대한 서운함은 그대로 녹아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어떤 서운함이었을까요?
⓵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을 정략적으로 진행한 점 
⓶ 14년 동안 너무 당연했던 남편이 행한 품에 대한 삯을 정당한 이유가 없이 착복한 점

이런 저런 불만과 서운함을 두 딸들은 이렇게 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겼다.” 그러면서 두 아내들은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기에 이릅니다. “아버지가 불법으로 빼앗아간 일체의 재물들은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것이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자.” 남편의 결정에 손을 들어준 셈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제안했던 정상적인 품삯을 거절하며 본인 스스로가 제안했던 것이 변종 염소와 양 새끼가 생산되면 그것을 내 소유로 인정해 달라는 생뚱맞은 제안을 던졌음을 이미 살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자 바보 같은 제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정말 바보 같은 자였기에 삼촌에게 이토록 불리한 제안을 했을까? 그럴 리가요. 이렇게 한 것은 곰비임비 식으로 야곱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조명 때문이었습니다. 몇 구절만 발췌하겠습니다.

본문 3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그렇습니다. 야곱은 야훼 하나님이 주신 이 조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밧단아람이 아닌 본인이 태어났던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명령과 조명을 받았기에 야곱은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구절, 본문 7-9절을 봅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결정타입니다. 7절에 등장한 10번이라는 숫자는 횟수 10번을 의미하는 숫자가 아닙니다. 중단하지 않고 지속했다는 의미를 완전수 10이라는 숫자에 담고 있습니다. 집요했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전율하게 하는 감동이 무엇입니까? 얼룩무늬 프로젝트는 야곱의 작품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작품이었다는 점입니다. 야곱이 멍청한 자이고, 바보 같이 어리석은 자였기에 실행하면 패배할 프로젝트를 외삼촌에게 제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본문이 분명히 재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8절) 우리가 상투적으로 알고 있는 익숙한 표현법으로 이 구절을 바꾸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11-13절을 읽겠습니다. 본문 구절 중에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구절이니 골똘히 말씀을 쳐다보십시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극히 위로가 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메시지입니까? 20년 전에 밧단아람으로 도피할 때 루스(벧엘로 이름이 바뀜)라는 곳에 도착해 피곤해 잠에 들었는데 꿈에 야곱에게 오셔서 나는 네 조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현현하셔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밧단아람까지 오셔서 다시 벧엘의 하나님이심을 재확인해 주신 하나님의 그 재 현현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감동의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재 현현하신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감동적인 구절을 본문에서 찾습니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2절) 무슨 말입니까? 너무나 외롭게 보냈던 이방 땅에서의 20년 동안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야곱, 그래서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었고, 떼를 쓸 수도 없었던 지난 20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이 전혀 없었던 야곱의 20년 동안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야곱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는 감동이 저를 폭격했습니다. 지난 번 다른 설교에서도 한 번 전했던 것처럼 결혼 생활 30년 이상 한 부부 간에 아내가 남편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단어가 바로 ‘수고했네!’라고 했던 것처럼 20넌 동안 밧단아람에서 생활했던 야곱에게 야훼 하나님은 지금, 그에게 오셔서 이렇게 따뜻한 말을 건네셨다는 말입니다. “야곱아, 지난 20년 동안 참 수고했다. 이제 고향을 돌아가자. 내가 너와 함께 갈 거다.”

근래, 홀로 기도 시간에 이 찬양을 많이 불렀습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자국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너는 내 아들 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 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이런 야곱의 영적인 행보는 아내들에게도 감동으로 이입되어 본문 단락은 해피엔딩을 마감됩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격려였습니다. 정서적 동의였습니다. 신앙의 노정은 ‘천로역정’입니다.
‘천로역정’을 한자로 쓰면 이렇게 씁니다. ‘天路歷程’ 즉 풀면 ‘하늘로 가는 길의 과정을 견디어 낸 이력’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가 천로역정의 길이 쉽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코 쉽지 않은 노정이자 여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험난하기 짝이 없는 길이 신앙의 길이지만 우리는 한 가지만 있으면 이 여정을 걷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동행해 주신다는 은혜입니다.

다시 본문 13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야훼 하나님의 이 명령은 야곱에게 희망이었습니다. 메가톤급 비전이었습니다. 20년 전에 자기에게 말씀해 주셨던 야훼 하나님의 조명이 벧엘에서 밧단아람이라는 장소만 바뀌었지 여전히 동일한 것이 하나 담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에 야훼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8:15절을 복기합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0년 전의 이 말씀의 약속을 실천하시기 위해 야곱에게 다시 오신 주님이 이 약속을 했던 벧엘로 돌아가라고 다시 천명하셨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한 가지를 다시 담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야곱아, 밧단아람으로 갈 때도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네 외삼촌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약속대로 너를 떠나지 않고, 너와 함께 했다. 이제 벧엘로 돌아가라. 벧엘로 돌아가는 과정도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동행하심만 있으면 됩니다.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며 하나님을 능욕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대노하셔서 모세에게 선언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3:3절입니다.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나는 너희와 함께 가나안으로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저주이자 심판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민족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간구했던 중보 기도가 이어지는 출애굽기 33:15-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려면 우리 이스라엘도 가나안으로 올려 보내지 말라는 떼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가나안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모세의 항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뼈저리게 느낍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신앙생활,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의 가장 뛰어났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그의 위대한 걸작인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를 완성했습니다.  이후 어느 날, 아퀴나스가 성전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제단에 걸려 있는 십자가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에 대한 참 좋은 책을 썼구나. 너는 나에게서 어떤 보답을 원하느냐?” 이에 대한 아퀴나스가 행한 대답은 단 한 줄이었습니다. “주여, 오직 당신만을 원합니다.”(이재철, “내게 있는 것”, 홍성사, pp,5-6) 

이 땅에 존재하다가 사라져간 자들 중에 하나님이 인정하신 백성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하나님과의 동행을 원했고, 그 결과 하나님이 동행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다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입니다. 그래서 시인도 이렇게 읊조리며 노래하며 고백했던 것입니다. 시편 16:8절을 읽고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