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혹서기를 보내는 나만의 피서 법 노하우 소개하기 | 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어둔 밤 쉬 되리니 (찬송가 330장) ● 복음성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이해가 되지 않는 것 ● 본문 : 창세기 30:25-43 1) 야곱이 라반에게 제안한 생뚱맞은 요구는? 2) 외삼촌에게 요구조건을 제안하고 라반이 승낙하자 야곱이 행한 일은? 3) 적용하기 ⓵ 머리로 믿는가? 심장으로 믿는가? ⓶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하는 레마를 나에게 적용해 보자. ③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알고 있는 종교적인 전 이해, 내가 이미 학습했던 상투적인 성경 지식들이 정말로 중요한 진짜의 사실을 밀어내치는 방해꾼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의 반응은? |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제목 ⓵ 예배에 나온 태신자들의 정착을 위해 ⓶ 이번 주간에 있을 환우들을 위하여 중보 ⓷ 여름 사역(성경학교, 수련회, 전교인 대청소 등등)을 위해 중보하기 ⓸ 담임목사를 위해 중보하기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예배에 참석한 태신자 정착을 위해 지속적으로 돌보기 2. 태신자 다시 선정하기 3. 셀 사역에 참석하지 않는 지체 독려하기 4. 셀 지체들의 기도제목 민감하게 중보하기 5. 6월 24일(예정)에 실시될 교회 대청소 사역 시간 비워두기
| 설교요약 (SUMMARY)본론) 야곱이 아람에 거한지 14년이 되는 해, 그의 장인이자 외삼촌인 라반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용기 있는 청을 합니다. 본문 25-26절을 읽겠습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야곱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14년이라는 세월은 결혼 지참금이 없었던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 대신 치른 삯이었는데 그 삯을 충분히 치르고도 남은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제 야곱에게는 책임을 져야 하는 처자식인 11남 1녀와 네 명의 아내까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마땅한 의무를 다한 야곱이었기에 라반 역시 딱히 그를 붙잡을 만한 책(責)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반은 그가 갖고 있었던 사기꾼적인 기질을 포기할 수 없었고, 특별한 재정적 부담 없이 노예처럼 부렸던 유능한 일꾼이자 사위였던 조카를 그냥 보낼 리 만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곱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묘수를 짜낸 것이 이제부터 정당한 품삯을 줄 테니 떠나지 말고 내 곁에 있으라는 종용이었습니다. 이미 외삼촌의 사기꾼적인 기질을 알고 있었던 야곱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라반의 요구에 이렇게 미리 계획한 안을 제시합니다. 본문 31-33절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양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품삯을 어떻게 해 주면 되겠느냐는 라반의 질문에 응대한 야곱의 답변은 대단히 비현실적이며, 생뚱맞은 것이었습니다. 품삯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삼촌의 양떼를 먹이며 일을 할 테니 앞으로 양과 염소의 새끼들이 태어나면 그 중에 얼룩진 것, 점이 있는 것, 검은 새끼들이 태어나면 나 내 재산으로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더불어 내가 외삼촌의 양과 염소들을 탈취하는 것이 있는지 공개적인 조사도 허락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품꾼들에게 고용인이 주어야 할 품삯은 통상 낳는 새끼들의 20%가 품삯인 것을 감안할 때, 조카이자 사위인 야곱의 제안이 라반에게는 손해 볼 장사가 아니었기에 흔쾌히 수락합니다. 사기꾼 기질이 있었던 라반은 이런 손해 볼 장사가 아닌 제안에도 솔깃했지만 닳고 닳은 라반이었기에 야곱의 제안을 근원적으로 원천 봉쇄할 충분한 방법이 있다고 믿었기에 조카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약조를 하며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이 약속을 한 뒤, 라반이 행한 대단히 치졸한 방법을 본문 35-36절이 고발합니다. “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무슨 말입니까? 야곱이 제안한 얼룩무늬와 점이 있는 숫염소들을 가려서 아들들의 통제 하에 두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롱지고 점이 있고, 검은 양들도 아들들에게 맡깁니다. 이것도 모자라 결국 모두가 흰 양과 염소들을 사흘을 걸어야 갈 수 있는 장소로 분리 이동시켜 아예 야곱이 요구한 양과 염소들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근원적인 대비를 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37-43절 본문을 읽다보면 월터 브루그만이 주석한 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뒤집으시는 양식’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반전이자 은혜입니다. 추적해 보십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야곱이 원하는 양과 염소 새끼들이 탄생할 방법은 없습니다. 유전적인 원천봉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든지 말든지 야곱은 자기 방식대로 양과 염소를 돌보고 칩니다. 야곱이 양과 염소를 친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⓵ 미루나무(버드나무), 감 복숭아나무(살구나무), 버즘 나무(신풍 나무)의 싱싱한 나뭇가지들을 꺾어다가 껍질을 벗겨 흰 줄무늬가 드러나게 합니다. 이렇게 한 껍질을 벗긴 가지들을 여물통 앞에 세워두고 양과 염소가 물을 먹으러 올 때 그것들을 보게 합니다. ⓶ 튼튼한 양과 염소들이 짝짓기를 할 때, 그들이 볼 수 있도록 껍질을 벗긴 가지들을 담은 여물통이 보이게 했고, 약한 양과 염소가 짝짓기를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물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본문 39절, 42절입니다.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39절)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42절)
결국 야곱이 원하는 대로 되었음을 창세기 기자는 보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 설교의 핵심적인 은혜를 얻게 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라반은 인간이 알고 있는 습득된 지적 체계 안에서 본인에게 유리한 일체의 방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기에 의기양양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유전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자연적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승리가 누구에게 임했습니까? 이런 자연 공학적인 상태를 뒤집어 승리를 얻은 주인공이 누구였습니까? 야곱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이 택한 방법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가 궁금해집니다. 구약학의 고전적 대가라고 인정하는 게르하르트 폰 라드 교수는 야곱의 행위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행위로 해석합니다.
“야곱의 계획은 아주 고대적인 온 세상에 퍼져 있었던 주술적 신앙에 기초한 것이다. 이 주술적 신앙에 의하면 일정한 가시적 인상이 인간이나 짐승에게 있어서 어미에게서 태아로 전달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미 짐승으로 하여금 ‘못 볼 것을 보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야곱은 줄무늬가 나도록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들을 물 먹이는 구유 안에 놓았다. 암컷들이 물 먹이는 구유가 있는 데서 교미를 하여 그 나뭇가지들을 보는 순간 갖게 되는 새끼들은 변종을 낳게 하는 것이다.”(폰 라드, “창세기 주석-국제성서주석”,pp, 336-337)
이렇게 고대 민담에서 믿고 있었던 주술적인 신앙을 야곱도 갖고 있었기에 이런 선택을 했다는 폰 라드의 해석은 야곱의 행위가 기독교적인 신앙과는 배치되는 행위임을 지적한 셈입니다. 재미있는 유태인들의 문헌에 담긴 본문과 연관된 상상의 나래를 또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유태인 문헌은 천사들이 라반과 아들들이 돌보고 있었던 양과 염소 중에 점이 있었던 것들을 모조리 야곱에게 운반해 왔다고 설명한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p,549)
송병현 교수는 이렇게 황당한 유태인 문헌은 물론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몇 몇 학자들의 주장을 복음적인 해석으로 일갈합니다. 개인적으로 송병현 교수의 지적을 저는 귀에 담았습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야곱이 사용한 방법을 과학으로 혹은 마술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야곱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이 원한 짐승들을 늘렸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창세기 저자가 이 사건을 통해 역설하고자 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셨다는 점이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p.549) 제가 송 교수의 해석에 천착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까지 하나님은 참여하셔서 일하셨다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일하십니까? 우리들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차원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우리들을 믿고 일하시면 실패하기에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과 역사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나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안티 크리스천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고 나오는 시비 거리가 폭력적인 성향의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으라는 것이냐는 반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단골로 들먹이는 메뉴는 신명기 7:1-2절과 여호수아 6:21절을 들 수 있습니다.
신명기 7:1-2절을 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여호수아서에는 모세의 계대를 이어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6:21절입니다.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멸절하라고 명하신 내용입니다. 이런 잔인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냐는 반문이 나올 법도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결론적인 결과물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습니까? 사사기 역사서의 증언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불순종합니다. 오히려 가나안에 들어가서 보니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없애야 할 존재가 아니라 상존해야 할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농경문화에 대해 ‘꽝’이었던 노예의 후손들에게 농사를 통해 수익을 얻기 위해 존재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가나안 거민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엄위함 명령을 어기고 도리어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가나안화 되어 갔습니다.
결국 이런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수천 년 동안 유리방황해야 하는 민족적 수모도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구도를 모를 리 없으셨습니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방법이 정경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 중에는 눈물을 머금고 정말 신비적인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할 필드가 있음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이 일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일 이룰 수 있음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선교 단체인 WEC 의 대표인 노만 그립의 글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난 자네가 알든 모르든 그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네. 내 관심은 그분이 자네 안에 계신가, 아닌가에 있다네. 만일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가 그분을 끌고 다닌다면 자넨 결국 그분께서 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는 거지.” (노만 그립, “제한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p,63.)
오래 전에 이 글을 처음 보았을 때 전율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적인 전 이해, 우리가 이미 학습했던 상투적인 성경 지식들이 정말로 중요한 진짜의 사실을 밀어내치는 방해꾼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종을 노만 그립이 서늘하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치열하게 질문합니다. 심지어 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분명한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심,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 완벽하다는 전제입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나는 주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동원 목사께서 쓰신 글에 담겨 있는 이야기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어떤 고등학생이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은행에서 온 전화입니다. ‘오늘 당신 계좌로 1,440불이 입금되었으니 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누가 나를 놀리는구나 생각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입금한 1,440불을 하나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그것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날,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도 한 푼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꼭 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은행에 가 조회해 보았더니 1,440불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돈이 불안해서 조금만 써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튿날 전화가 왔습니다. ‘그냥 조금 쓰셨더군요. 유용하게 잘 쓰시기를 바라며 1,440불을 또 입금하겠습니다.’ 그래서 이게 웬 떡인가 싶어 그는 마구잡이로 1,440불을 마구 써버렸습니다. 그 이튿날 또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돈을 찾아가셔서 그냥 막 써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유용하게 쓸 것을 기대하며 입금을 한 것인데 선생님은 아무래도 이 돈을 책임 있게 사용하지 못하실 것 같아 일주일로 이 일을 마치겠습니다.’ 그리고는 입금한 사람을 바꿔 주었습니다. 전화 목소리는 재벌인 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전화기를 받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이제 돈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테스트한 것이다. 하지만 이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단다. 나는 너에게 매일 1,440불을 입금했지만, 하나님은 매일 우리에게 1,440불이 아니라, 1,440분을 주신단다. 이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란다.” (이동원, “꿈으로 사는 비전 인생”, 요단, p,112-113)
하나님은 우리들이 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처럼 미완의 미성숙함으로 도배되어 있음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기를 테스트하시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고 계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믿음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일하심은 그 반대의 이면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반전의 은혜가 있음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아멘 하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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