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사역하기 (WORK)설교요약 (SUMMARY)2022년 3월 20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3) 본문: 히브리서 6:13-18 제목: 가볍지 않기를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하셨던 약속을 상기해 주는 본문입니다. 13-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창세기 12:1-2절의 상기입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맹세의 서약을 했던 이름이 쇼킹하다는 점입니다. 본문 16절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내가 누구에게 진정성이 있는 약속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 나보다 큰 자를 내세우는 것이 실례입니다. 그런데 13절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줄 것이라는 약속을 천명하기 위해 내세운 존재가 하나님 당신이었다는 말은 대단한 무게감을 줍니다. 하나님보다 신실한 존재가 이 땅에 누가 또 있습니까? 하나님 말고 나를 확신시킬 존재가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시인의 토로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시편 53:1-3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인이 토로한 언어 중에 눈길이 가는 단어가 있습니다. ‘굽어 살피다’입니다. 히브리어 ‘솨카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몸을 내밀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급하고 답답했으면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하나님이 몸을 내밀 정도로 관심 있게 선을 행하는 자를 찾아보신다고 표현했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찾으셨지만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말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까? 사정이 이러하기에 인간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은 어그러지기 일쑤이며 이로 인하여 맹세한 일로 인하여 다투기가 다반사임을 히브리서 저자가 고지합니다. 이것을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인간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에게 줄 복을 확신시키신 것입니다. 이런 진정성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그대로 수용하고 믿을 수 있었던 이유를 밝힙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브라함의 장점은 ‘오래 참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수요일 예배를 통해 마음에 깊이 담아야 하는 아브라함에 관한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아브람을 세속적인 왕의 상징인 소돔 왕 베라가 마중 나와 엘람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얻은 일체의 노획물과 전리품 전체를 가지라고 종용할 때 아브람은 내가 이 전투에서 얻은 것 중에 단 한 개로 취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메시지를 함께 공유했습니다. 컬럼비아 신학교의 월터 브루그만 교수의 해석을 이유로 제시했습니다. “아브람은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음을 밝히며, 그 하나님께 손을 들어 맹세한다. 아브람이 이미 얻었으면서도 아직 얻지 못한 행복과 번영은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책략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월터 브루그만, “현대성서주석-창세기”,p,222.)
아브람의 출신이 어디였습니까? 세속적 풍요의 도시였던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의 세속적인 맛에 길들여져 있었던 아브람은 그 맛과 결별하기가 아쉬워 하나님이 하명하신 가나안으로 향하던 어간 하란에서 머뭇거렸습니다. 다시 강력한 하나님의 압박하심에 이끌려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기근이 임하자 더 좋은 세속의 땅이라고 생각한 애굽으로 내려가는 실수도 범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 돌아온 가나안에서 비로소 야웨 하나님을 이름을 부르며 신실한 예배자가 됨으로 그는 조카 롯과의 이별이라는 아픔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만 의지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수요 예배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브람은 신앙적으로 온전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넘어질 수 있는 약한 자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전인격적인 예배자로 서면서 이렇게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영적인 승리는 세속적인 부귀나 영화를 손에 쥠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붙드는 것에서부터 임한다는 사실에서 흔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15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인정했기에 이렇게 보고한 것입니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본문 17-1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구원의 확신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자들입니다. 배교의 선을 넘어설까를 저울질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나누었던 히브리서 5:8-9절을 분명하게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것을 확신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이 무엇이라고 히브리서 저자가 강하게 역설합니까? 주님께서 구원 받은 자들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처럼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변개하는 거짓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우리들에게 결코 가볍지 않게 하신 약속을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다시 천명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들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러므로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 피하여 이 시대의 암울함 속에서 큰 위로를 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홈페이지에 서평을 올려놓았습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의 내용은 정말로 최고였습니다. 왜냐하면 시대를 지나오면서 선생은 최고의 지성을 불렸기 때문인데 마지막 수업을 통해 발견한 것은 그의 마지막이 최고의 영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의 제자인 김지수 기자가 이제 죽음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갖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고, 그 대담의 내용을 묶어 책으로 출간한 것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인데 모든 대담 내용은 정말로 버릴 것이 없는 금과옥조의 글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저를 흔들어 놓았던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김지수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물을 게요. 당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것이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항상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돌아갈 곳이니까. 촛불도 마찬가지야. 촛불이 수직적으로 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어.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이어령,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pp,293-294) 이어령 선생이 말했던 죽음 앞에서의 서사 중에 결코 우리들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교훈이 그의 말에 담겨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죽음이라는 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야.” 성도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라는 자리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원래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라는 피난처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령 교수보다 이것을 먼저 알았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46:1-3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사도 바울도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로마서 8:35-39절입니다.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주님의 약속하심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이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나 또한 주님 앞에서 경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볍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심은 한 번의 약속이 아니라 영원하신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피난처 되시는 주님께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 환란의 날에 그분의 그늘 아래에 숨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임을 명심하고 주께 피하는 가볍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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