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사역하기 (WORK)설교요약 (SUMMARY)2022년 3월 13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2) 본문: 히브리서 6:9-12 제목: 끝까지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를 영접하였다가 흔들리거나 넘어져 다시 유대의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자들을 배교자라는 극단의 언어로 사용하면서까지 경계했습니다. 저자는 독자들 중에 상당수가 유대교로 배교를 했거나 배교의 위험성이 있다는 긴박한 위기의식을 갖고 월권을 한다 싶을 정도의 거친 발언을 동원하며 배교를 막으려 했다고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전했습니다. 히브리서 6:4-6절이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배교의 기로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 본문은 그 구절이 주는 무게가 대단히 무거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4-8절에서 거의 압박에 가까운 경고성 멘트를 날렸던 저자가 배교를 할 위험성이 있는 독자들을 부르는 호칭이 반전이자 파격입니다.‘사랑하는 자들’이라는 호칭이 그렇습니다.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서에서는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총 13장을 통틀어 이 표현이 바로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저자는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인물이든지 아니면 히브리서 독자들에 대해서 이 정도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든지 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본문 9절의 호칭은 대단한 파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갑자기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한편으로는 강온전략을 폈고 혹은 채찍과 당근 요법을 사용한 것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문 9절 이하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사용한 발언들을 보면 위에서 말한 강온전략이나 당근채찍 요법이라기보다는 저자가 갖고 있었던 영적 진정성이 그만큼 간절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더 복음적인 해석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9절 다시 한번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이보다’라는 단어는 4-8절의 경고성 멘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경고성 멘트를 너희들에게 던지기는 했지만, 실은 이 설교문을 읽고 있는 너희 독자들에게 진짜로 전하고 싶은 것이 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더 좋은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배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구원 받은 자들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구원 받은 자라는 소속감을 갖고 있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성도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백성들이 행했던 일체의 일들에 대하여 낱낱이 기억하고 있음을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본문 10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저자는 구원 받은 백성들이 행한 일을 열거합니다.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해 사랑을 나타내 준 일, 성도들을 섬겨준 일, 그리고 지금도 계속하여 섬겨주고 있는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계신다고 격려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시기에 이 아름다운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고 상기해 줍니다.
책을 읽다가 밑줄은 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용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불행히도 30년 이상 산 부부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부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작가는 소개합니다. 그런 뒤에 예외로 대화를 잘 하면서 30년 이상을 산 부부들에게 물었답니다. 서로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를. 작가는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고 싶다고 답할 줄 알았는데 “애썼다.”입니다. 가만히 뒤돌아보면 30년 이상 된 부부들 중 필요한 말이 이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남편과 아내 서로와 사랑한 자녀들을 위해 행했던 일에 보상받고 싶은 말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애썼다.’ 이 한 마디일 것입니다. 저 역시 목양 40년 즈음에 은퇴를 하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목사야, 애썼다.” 신실한 성도들은 이 칭찬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본문 10절에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라” 이렇게 급반전을 이룬 히브리서 저자가 오늘 본문 11-12절에서 주목해야 할 권고를 남깁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 구절을 통해 독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을 그랜트 오스본 교수가 이렇게 전합니다. “6:10-12 절에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삼중주를 발견한다. 특히 소망의 메시지는 더 그렇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할 수 있지만 소망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소망의 핵심은 그것의 미래성에 있다. 영광스러운 미래가 없다면 예수에 대한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랜트오스본, “적용을 도와주는 히브리서” 성서유니온선교회, p,149.)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이 게으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소망의 풍성함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적시했습니다. 더불어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믿음과 오래 참음이라는 신앙의 행위를 통해 반드시 하나님께서 행하신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는 후에 살필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일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선포했고, 동시에 그들을 향하여 믿음을 갖고, 소망의 풍성함을 유지하라고 권면했음을 10-12절이 알려줍니다. 오스본 교수의 말대로 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삼중주를 선포한 셈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선포했던 살벌했던 경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따뜻한 권면으로 본문을 장식한 셈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 중에 하나는 분명히 강온전략, 당근과 채찍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아도 그리 큰 과장은 아닌 듯합니다. 배교하려는 자들에 대한 압박과 더불어 품에 안으려는 노력까지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자의 노력을 보면서 설교자인 제가 아주 강하게 붙들려고 한 테마가 있었습니다. 결코 유대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강력하게 천명하는 메시지를 접하면서, 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행했던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격려까지 보면서 정말로 저자가 치열하려고 했던 중요한 한 가지가 보였습니다. 더 좋은 것(9절)을 끝까지(11절)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문장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 구원 받은 은혜의 감격을 끝까지 유지하라는 권면입니다.
내가 받은 그 구원의 감격을 끝까지 유지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구원받음이라는 감격은 풋내기들이 행하는 사랑처럼 금방 타올랐다가 금방 꺼지는 하룻밤의 감격이 아닙니다. 구원받음의 감격은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받은 감격이기도 하지만, 그 날 하나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감격은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지가 있었던 히브리서 저자였기에 우리가 이미 살폈던 히브리서 2:1-3절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천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장이라는 제목이 붙는 장입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의 정황을 예언한 역사적 배경이 되는 텍스트이지만 곧잘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날을 이미지화한 장으로도 마태복음 24장은 유명한 장입니다. 24:9-13절을 소개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영적 태도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영적 상태는 24장의 정황보다 더 안 좋으면 안 좋아졌지 호전 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우리는 지금, 펜데믹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지난 2년 3개월을 뒤돌아볼 때 펜데믹 현상이 성도에게 가져온 최고의 불행과 재앙은 영적 황폐함입니다. 영적 황폐함이란 부흥회가 열리면 경험했던 펄쩍펄쩍 뛰는 뜨거운 신앙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지난 2년 3개월 동안 경험했던 영적인 황폐함은 신앙인의 삶의 의미를 마비시킨 영적 무의미로의 진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89:11-12절에서 시인인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나이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이 엄청난 통치력을 갖고 계신 존재가 하나님이신데 지난 2년 3개월 저와 여러분은 이런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의미에 점점 더 무관심해져 왔습니다. 철저한 사탄의 행태들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공범자로 변질되는 나와 너를 부인할 수 없이 망가진 자들이 즐비합니다.
오늘 주시는 히브리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을 경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당신이 살아가는 삶의 형편이 이런 영적 황폐함인데 당신은 끝까지 내가 준 구원의 감격이라는 장에서 이탈하지 않을 것이냐를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저 높은 곳은 물론, 당신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현장인 이 땅에서 여전히 늘 항상 당신 옆에서 당신을 붙들어주며 절망의 구렁에서 건져주며 일으켜 세워주는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끝까지 견지할 것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3: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의 주군이신 예수께서는 저와 당신(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이 주신 구원의 감격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주군에 대한 당연한 예의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미 살핀 히브리서 3:14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논어의 子罕篇에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歲寒然後知松栢後凋也. (세한연후지송백후조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만 추운 겨울에도 나름의 청정함을 유지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추운 겨울의 모진 바람과 눈보라에도 끝까지 견디는 소나무는 어딜 보나 푸르고 푸릅니다. 이렇게 끝까지 견디는 소나무에서 내 신앙의 그림자를 봅니다. 우리는 정말로 주님이 주신 구원의 감격을 끝까지 지키며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지난 주간에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 상록수를 여러 차례 불렀습니다. 노랫말이 이렇습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믿음의 사람들은 구원의 감격을 쉬 버리거나 변치 않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끝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신 거처럼 우리도 끝까지 이 감격을 사수하여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애썼다’고 격려 받으며 끝내는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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