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11월 10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완전한 한계를 경험하는 때는 언제인가요?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 복음성가: 하나님의 은혜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은혜가 결론입니다.
● 본문 : 갈라디아서 6:14-18
1) “형제들아”라는 단어를 알아봅시다.
⓵ 사전적인 뜻으로 볼 때, “형제들아”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
⓶ 설교자의 두 가지 해석은 어떤 것인가요?  

2) “은혜”라는 단어를 알아봅시다.
⓵ 로마서 5:6-8절,
  -티모시 켈러:
  -찰스 카우사:
⓶ 누가복음 17:11-19절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결론 부분 참고)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14일 대학 수학능력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을 위하여(이한빛 신예찬 정윤서 우혜민)
2) 담임목사 셀 대심방과 누락자 심방을 위해
3) 입원 중인 환우들을 위해 (고수자 권사, 김제원 집사))
4) 각 지역 셀에서 섬기고 있는 태신자들이 금년에 결실을 맺도록
5) 홈 커밍 데이 축제를 통하여 불신자 가족들이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오도록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대학원 강의, 후반기 사역의 승리 등) 


셀 사역

1)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2) 공 예배 준수하기
3)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4)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5)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6) 추수감사절 준비 하기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요약
본문 : 갈라디아서 6:14-18
제목 : 은혜가 결론입니다.

  서론)
  지난 1년 동안 갈라디아서를 붙들고 나름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안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하나로 충분하다는 복음의 능력은 결코 다른 어떤 것으로 변질시키거나 훼손시키지 말아야 함도 배웠습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를 변질시켰던 갈라디아 교회 안의 배교자들은 물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선포할 정도로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불화살 같은 강경모드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갈라디아서는 전투 서신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갈라디아서 1:6-10절은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절정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이 강경한 태도와 자세를 서신 내내 유지합니다. 그 증언 중에 하나가 오늘 읽은 본문 14-17절에서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지난 43번에 걸친 강해 사역을 통해 바울의 이러한 면모와 그의 신학적인 바탕에 대하여 심도 있게 공부했고 성찰해 왔습니다. 대쪽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한 바울,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십자가 신학에 대해서는 한 발도 뒤로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강경파 바울을 우리는 지난 43번의 공부를 통해 족히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서를 마치는 마지막 바울의 한 마디가 왠지 마음을 ‘쨘’하게 만드는 극적 반전의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본론)
  저는 본문의 두 단어를 오늘 설교를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감하는 마지막 절에서 그토록 강한 메시지로 경고하던 수신자들인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배교자까지 포함하여)을 향하여 이렇게 호칭합니다. ‘형제들아’ 이 단어는 ‘자궁’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델푸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엮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자에게 붙여주는 단어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헬라어 단어 ‘필리아’ 즉 ‘형제의 사랑’이 담보된 막역지간을 말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종합해 본다면 그리스도 예수 보혈이라는 영적 자궁에서 흘리는 보혈이라는 사랑 안에서 엮어진 관계인 사람들에게 붙이는 단어가 바로 ‘형제들아’에 담겨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편지의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언급한 것을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설교자인 저는 해석합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배교자들이 돌아와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2.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일체의 성도들을 아직은 포기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절절하고 따뜻한 단어로 마지막 절에서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호칭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렇게 호칭한 바울은 여타 다른 서신에서와 같이 같은 축도로 편지를 맺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또 하나 주목하려는 단어는 말할 것도 없이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언어인 은혜라는 이 단어는 그래서 참 소중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유일한 은혜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어떤 은혜입니까? ‘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셨던 은혜’입니다.
로마서 5:6-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정말로 눈물겹도록 엄청난 사랑의 절정체인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위해 오셔서 죽으신 은혜”입니다.
  뉴욕 리디머 교회를 섬기는 티머시 켈러 목사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신을 찾아내고 싶다면, 너희가 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너희가 더 높은 의식을 갖고 싶다면, 신적 존재와 교통하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너희는 무언가를 행하여야 한다. 너희는 힘을 모아야 하고, 규율을 지켜야 한다. 너희의 정신을 자유롭게 하고, 그런 다음 그 정신을 채워 넣어야 한다.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고 싶다면, 너 자신을 올바르게 만들고 싶다면 너의 이성과 힘을 다하여서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이와 정반대다. 기독교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 주기 위해 오셨다. (중략) 기독교는 자신의 결함이 단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심각하게 만신창이가 되어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강함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티머시 켈러, “예수를 만나다.”, 베가북스, pp,40-4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 오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즉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오로지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누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배교하며 이 은혜를 저버린 자들을 포함한 일체의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을 향하여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선포하며 글을 맺은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미국 컬럼비아 신학대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챨스 카우사 교수는 이런 바울의 심정에 동의했기에 다음과 같이 18절을 주석했습니다. “바울의 18절 마감 축도는 다른 바울 서신들에서 나오는 친숙한 본보기를 따르고 있다. 그것은 자주 사용된 축복이다. 그렇지만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의 이 축도는 이미 바울이 앞선 6장을 통해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요구했던 가장 기초적인 생명의 은혜를 다시 회복하고 받아들이도록 강조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찰스 카우사, 갈라디아서 주석- 현대성서주석, 장로교출판사, p,217.)
  이상의 갈라디아서 18장 주석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얻어야 할 마지막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결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 은혜라는 교훈입니다.   
  은혜가 결론입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되는 은혜입니다.
  지난 주간, 마크 뷰캐넌의 역작인 “Your God is too safe.”에서 너무 귀한 은혜를 받은 대목이 있습니다. 이 텍스트의 배경인 누가복음 17:11-19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너무나 잘 알고 익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주님의 은혜로 나병이라는 당시 천형에서 치유 받고 해방된 10명의 환자들에 얽혀 있는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마크 뷰캐넌 목사가 이 구절을 해석한 한 문장에서 정말로 아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뷰캐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진 후에 다시 예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린 것을 예배라고 정의했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 P,395) 제가 왜 이 문장에 열광했는지 아십니까? 저주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9명의 나병환자는 오늘도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런 영적 나병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서 치유된 은혜를 받은 자들은 우리 주변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상당수는 주 예수께서 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종교적인 헌신이나 돈 주고 돈 먹는 식의 보상을 받은 정도로 생각하는 영적 무례를 범하는 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경성할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우리 세인교회에는 없다고 자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유감스러움 속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라는 진짜 은혜를 받아 주님께 예배하러 온 나병환자와 같은 은혜 수여자가 우리 교회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은혜를 아는 자, 맛 본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은혜가 무엇입니까?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고침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여 그 분에게로 내 마음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진짜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멘로파크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인 존 오트버그 목사는 이렇게 서늘한 비수를 그의 글에서 던졌습니다.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영혼이 헌신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다.”(존 오트버그, “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국제제자훈련원, p,117.)
  은혜는 내가 좋아하는 그 어떤 것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결론이며, 이강덕 목사의 결론이고, 갈라디아서의 결론이며, 성경의 결론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갈라디아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갈라디아서 6:1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은 뒤에 잊지 않고 한 가지를 의도적으로 유도했습니다. “아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지금도 은혜를 공급하고 계신다는 사실에는 주저 없이 아멘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공식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것을 내가 믿겠다는 공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감하면서 교우들에게 몇 구절을 낭독하겠습니다. 다 같이 뜨거운 심정으로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 1:6-10
-갈 2:20
-갈 6:14
-갈 6:17
-갈 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