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고치고 싶은 것과 바꾸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갈보리산 위에 - 150장 ● 복음성가: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중심에 서 있습니까? ● 본문 : 갈라디아서 6:15-16 1) 15절을 해석합시다. ⓵ 바울이 지지하고 응원하였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⓶ 바울의 최대 관심은 무엇입니까? |
2) 16절을 해석합시다. ⓵ “규례”를 무엇이라 해석하나요? ⓶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동격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수시 및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을 위하여 (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2) 11월 월삭예배 및 가을 단풍관광 등 사역을 위해 3) 수술을 앞둔 지체 및 환우들을 위해 4) 세인교회가 시대를 역행하는 주존심으로 굳건히 서도록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대학원 강의, 후반기 사역의 승리 등)
셀 사역
1)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2) 공 예배 준수하기 3)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4)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5)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요약 본문 : 갈라디아서 6:15-16 제목 : 중심에 서 있습니까?
서론)
교회 안에도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극단의 경우가 줄곧 존재합니다. 그래서 자기주장이 강한 신자들과 함께 가는 것이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할 수 있는 바로미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기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 교회를 만들어가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모세는 본인이 열조에게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음을 알고 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를 불러 리더십을 인계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여호수아 1:7절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바로 이 대목에서 교회와 성도가 지켜야하는 교훈을 찾습니다. 우로 아니고 좌도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기회주의자라고 혹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우로 치우치지 않은 이유나, 좌도 치우치지 않는 이유가 줏대가 없거나 눈치를 살피기 위해서라면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이유가 본말이 전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 사람은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중심주의자이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선언한 메시지를 통해 교우들과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바울은 무할례자들을 칭찬하거나 그들의 편에 섰던 적은 없습니다. 바울이 지지하고 응원하였던 자들은 무할례자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며 할례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진짜로 강조하며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본문 15절 하반절에서 분명히 천명합니다. ‘새로 지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 오늘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날마다 새롭게 지음 받도록 독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은 바울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이유 때문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것은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바울의 최대 관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천착해야 하는 중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왜 중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14절에서 세밀하게 살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14절을 근거하여 설교를 통해 분명히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러 돌아가신 주님으로 인해 주님이 불편해 하시는 이 땅에서의 모든 것에서 뒤돌아서는 것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체의 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첫째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이유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예수의 십자가를 나도 짊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기 때문임을 지난 설교를 통하여 분명히 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의 내용을 본문 16절과 연관하여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구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규례(RULE)를 행하는 자라고 했는데 도대체 규례가 무엇일까요? 저는 문맥에 따라 ‘규례’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이 불편해 하시는 일체의 것들에서 떠나는 삶과 동시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고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며 살아가는 즉 날마다 새롭게 지음을 받는 삶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은혜를 하나 찾아낼 수 있습니다. 16절에 번역된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면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두 개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헬라어 원어 성경을 직역하면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원어 성경을 보면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동격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전적인 해석으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 전부를 포함하는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이런 구원의 보편성이 누구에게까지 미친 것입니까? ‘새롭게 지음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 세상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재탄생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 세인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불편해 하시는 일체의 것들에게서 떠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그 삶을 살아내려고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짊어지심이라는 이 위대한 영적 혁명을 그 안에 있는 지체들의 삶에서 새롭게 지음 받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에서 이탈하면 교회는 정치적인 집단으로 발전되든지 아니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 변질됩니다. 교회는 중심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지음을 받아가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분명한 중심에서 결코 이탈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
16세기 위대한 영성을 남기고 떠난 아빌라 테레사는 그의 걸작인 ‘내면의 성’에 두 번째 성채에서 본 영적 조명을 이렇게 무게감이 있게 남깁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우리 안에 사시는 새 생명을 바라보라. 그분처럼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분에게 가르쳐 드리려고 주제넘게 그분에게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하다.”(아빌라 테레사, “내면의 성”, 요단, 2011년,P,91)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가끔 이런 아픔에 젖어들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에 맞추어 따르도록 압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픔 말입니다. “이게 주님 맞는 일입니다. 그러니 주님도 따르세요.” 너무나 불손하게도 이렇게 주님에게 충고하고 가르치려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교회에서 너무나 비일비재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여 못내 슬프고 유감스럽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날마다 짊어지며 그 분이 원하셨던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들이 행하며 살아가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왜?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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