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집안 정리할 때 버리는 물건을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어느 민족 누구게나 - 586장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단호할 때는 단호해야 합니다. ● 본문 : 갈라디아서 5:7-12 1) 바울 리더십의 첫 번째 탁월함은 무엇입니까? 2) 바울 리더십의 두 번째 탁월함은 무엇입니까?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교회학교 여름 사역을 위해 (어린이캠프, 청년학생 수련회) 2)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3) 대입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하여(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4)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셀 사역
1)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2) 공 예배 준수하기 3)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4) 결석하는 셀 원들 독려하기 5)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 요약 본문: 갈라디아서 5:7-12 제목: 단호할 때는 단호해야 합니다.
서론: 목회는 성도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는 안 됩니다. 경우에 따라 대단히 냉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서슬이 시퍼런 냉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공부해야 할 본문을 해석하면서 영적인 리더십에 있어서 빈틈이 없었던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언젠가 민수기 16장을 성서 일과로 읽으면서 목회자만 느낄 수 있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정이 솟구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고라와 아비람과 다단의 반역 사건입니다. 레위의 둘째 아들이었던 고핫의 아들인 고라가 주동이 되어 아비람과 다단 그리고 동조하는 250명이 결기하여 모세와 아론으로 통치되던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권에 반기를 든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공격을 받은 모세는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로하는 대목을 읽어 보십시다. 민수기 16:15절입니다. “모세가 심히 노하여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는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나는 그들의 나귀 한 마리도 빼앗지 아니하였고 그들 중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하나님은 모세의 이런 억울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해서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민수기 16:20-21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모세의 토로에 응답하겠다는 즉각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통쾌한 하나님의 갚아주심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은 모세가 자신의 억울함을 강력하게 토로하던 15절과는 정반대로 사시나무 떨 듯이 갑자기 하나님께 대단히 급한 SOS를 보냅니다. 이어지는 민수기 16:22절을 읽습니다.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 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나님의 통쾌한 복수극을 눈앞에 둔 두 사람, 모세와 아론이 갑자기 이렇게 돌변합니다. “하나님,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십니까? 고라 한 사람이 반역한 일을 가지고 어떻게 당신이 선택한 백성 모두를 진멸하시려고 한단 말입니까? 거두어 주옵소서!” 이렇게 급하게 반전의 기도를 하는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를 들으신 야웨 하나님께서곧바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민수기 16:23-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회중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방에서 떠나라 하라” 무슨 말입니까? 심판의 대상을 패역한 이스라엘 전체에서 반역한 고라, 다단, 아비람, 그리고 250명의 반역자로 한정하신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영적인 리더는 참 두려운 자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모세 자기를 맹폭하던 고라 일당에 대하여 너무나 억울하고 속이 상해 하나님께 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신원을 들어 갚아주시기 위해 심판을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을 들었던 모세는 갑자기 벌벌 떨리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민족의 멸절이라는 참극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공포 말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두려웠지만 너무나도 단호하게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다시 중보를 드립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중보를 우유부단하다고 야단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각을 바꾸시고 범죄자들만 심판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모호해서는 안 됩니다. 끊고 맺는 것에 있어서 단호해야 합니다. 우유부단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것도 좋은 것이고. 싫은 것도 좋은 것이어서 안 됩니다. 이제 저는 오늘 공부의 내용인 본문 안에서 만나는 바울의 리더십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본문 7-9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면 네 가지의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⓵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경주를 잘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⓶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진리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⓷ 이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누군가가 방해했다는 점입니다. ⓸ 그 방해는 거짓이므로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의 리더십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세운 뒤에, 여타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감당하였고 이후, 에베소라는 곳에 거하고 있을 때 갈라디아 교회의 와해라는 보고를 받은 것이 이미 갈라디아 교회를 떠난 지 짧게는 5년 이상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본인이 세운 교회에 대한 영적 상태를 놓치지 않고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담임목회자와 같은 맥락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당시 그가 세웠던 교회들에게 대한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지원했다는 점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하는 철저한 리더십의 장점입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을 오늘 설교의 주제 교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어떻게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이어지는 본문 10-12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이 구절을 바울이 갖고 있었던 두 번째의 중요한 영적 리더십을 발견하게 됩니다. ※ 영적인 단호함입니다. 바울은 경고합니다. 너희들을 거짓 권면(율법주의로의 회귀)으로 미혹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할 것이라고. 어디 이뿐입니까? 거짓 권면에 넘어간 자들을 향해서도 서슬이 시퍼런 선포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어리석음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역설한 바울은 결정적인 비수를 던집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기록된 ‘베어버리다’ 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포콥폰타이’라는 동사의 직설적인 의미는 대단히 과격한 단어입니다. ‘스스로 거세하다’(CUT THEMSELVES)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이 단호하게 본인의 철저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역설한 본문 메시지를 마음에 담으며 함께 공유하고 살아내야 할 은혜를 찾고자 합니다. ※ 나를 어지럽게 하는 죄의 경향은 단호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13:8-9절을 소개합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던 그 사이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벽 재건을 방해했던 도비야에게 제사장 엘리아십은 성전에 기명들을 보관해 두어야 하는 방 하나를 비워 친근하게 지낸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어 주는 기가 찬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격분한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내어 던져버리고 이방인 출신이었던 도비야로 인해 더럽혀진 성소의 방을 다시 청소하여 하나님께 드릴 제사의 기명들을 다시 원위치에 놓음으로 망가졌던 성전의 방을 청결하게 하는 장면이 느헤미야 13:8-9절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옛 구습으로 회귀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옛 습성과 조의 종노릇하던 구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경종입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얼마든지 에베소서 2:1-3절에서 바울이 말했던 그 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경종입니다. 에베소서 2:1-3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서 경책하여야 할 은혜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나를 어지럽히는 일체의 죄의 경향은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버리고 주님을 택하기로 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위탁하게 하는 것을 반대하는 일체의 세속적 경향을 제거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베어 내야 합니다.
결론 : 제가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많은 신자 중에 잘 믿는다는 편에 속한 자들은 이런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나님, 99%까지 갔으니까 이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나머지 1%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하나님, 그 1%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2014년 독서 목록 중에 저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던 랭던 킬키의 ‘산둥수용소’의 끝부분에 보면 미국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도리어 반성서적인 착각에 빠져 있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불신자들에게 던지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다. 즉 죄란 자아와 자아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인 관심과 헌신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랭던 길키, 산둥 수용소, p,432) 정말로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엄청난 통찰의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포장하지 마십시다. 겉 멋든 종교인이 되지 마십시다. 나를 신앙의 결기에서 어지럽히는 일체의 것들을 단호하게 베어 내십시다. 스스로 제거하십시다. 성도는 단호할 때 단호한 사람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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