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깨닫고 감사한 것들 중에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 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깨닫게 해 주었으면 바꿔라 ● 본문 : 갈라디아서 4:21-31 1) 복음에 머물 것인가, 율법으로 돌아갈 것인가? ⓵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본문 22-24절과 25-28절로 설명해보라. ⓶ 갈라디아 교인들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본문 29-31절) |
2) 갈라디아인들의 실상을 알아보자. ⓵ 갈라디아인에 대한 바울의 선포는 무엇인가?(본문 30-31절) ⓶ 갈라디아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21절) |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지역 셀에서 초청된 지체들을 잘 관리하고 섬겨 정착할 수 있도록 중보 2) 교회학교 여름 사역을 위해 (어린이캠프, 청년학생 수련회) 3)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4) 대입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하여(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5)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셀 사역
1) 지역 셀에서 초청된 지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섬기기 2)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3) 공 예배 준수하기 4)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5) 결석하는 셀 원들 독려하기 6)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 요약 본문: 갈라디아서 4:21-31 제목: 깨닫게 해 주었으면 바꿔라
서론 : 지금은 사라졌지만 신학교 시절에 학교 동아리에 윤락여성 전도회라는 써클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입한 써클은 아니었지만 신학교 선후배 중에 이 동아리에 가입하여 당시 돈 때문에 팔려온 적지 여성들을 다시 갱생의 길로 인도하면서 새 삶을 찾아준 훌륭한 주의 종들을 많이 배출한 서울신학대학교의 좋은 모임이었습니다. 윤락 여성 중에 상당수는 가난 때문에, 유혹에 빠져서, 빚 때문에 등등 여러 가지 구렁텅이에 빠져서 어쩔 수 없는 여성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윤락 업이 마음에 들어 즐기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정말로 대처하기 어려운 부류의 군상들이 있습니다. 가르쳐 주었는데 배운 대로 살지 않는 군상들입니다. 모르는 것은 결코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은 모르는 것을 깨달아 알았는데 아는 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본론 :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휩쓸고 있는 율법이라는 논제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있었던 예수 믿었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자신이 전한 예수의 복음을 저버리고 유대 율법주의로 회귀한 것에 대한 참담함을 되돌리기 위해 할례 유용론을 주장한 유대율법 교사들과 그들의 교묘한 유혹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에게 대단히 민감하고 절대적으로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금기사항 같은 아브라함의 가정사를 이끌어 냄으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한 할례를 내세운 율법주의의 허상을 맹공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우리가 이미 아는 내용처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갈의 소생이었던 이스마엘이고, 사라의 소생인 이삭입니다. 이 역사적인 족장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아브라함의 가계도를 개봉한 바울은 그의 이야기를 하나의 비유로 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본문 22-24절을 봅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하갈과 사라는 두 언약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노예였던 하갈은 율법을 의미하지만, 자유 하는 여자였던 사라는 복음을 의미한다고 역설합니다. 본문 25-28절을 읽습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하갈은 시내 산이고, 사라는 예루살렘이라고 못 박습니다. 시내 산이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율법을 수여 받은 장소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을 바울은 자유 하는 자들이 사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구절은 25절인데 시내 산의 중요성을 이렇게 한정한 점입니다. 시내 산은 예루살렘이 존재하기 이전까지의 성소와 같은 곳이었다는 주장입니다. 하갈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이 존재하면서 시내 산은 그 예루살렘에 소속되게 되었다는 역설입니다. 이 말을 하갈과 사라의 말로 풀어봅니다. 하갈이 낳은 율법의 아들을 상징하는 이스마엘이 존재하는 존재의 중요성은 사라가 이삭을 낳기 전까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마엘은 율법의 상징인데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이 탄생함으로 율법이 해야 할 역할이 이제는 이삭의 역할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이 집중해야 하는 내용은 이제부터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을 재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이 어떠했습니까? 이어지는 29-31절을 마저 읽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직격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 21장을 먼저 나누어야 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같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마엘이 경쟁자로 보았던 이복동생 이삭을 놀리는 것을 사라가 보고 남편 아브라함에게 알리며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쫒을 것을 종용합니다. 이 일을 당한 아브라함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괴로워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현현하십니다. 그리고는 창세기 21:12절에서 아주 중요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이 구절에서 주목하고 또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이 지점입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2절 후반절)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갈라디아서의 정황이 어떤 정황이었습니까? 창세기 21장과는 정 반대되는 정황이 아닙니까?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이 사라의 몸에서 난 이삭을 박해하고 있는 꼴이라고 본문 29절은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떠나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작금의 일들은 마치 이스마엘을 보존하고 이삭은 쫒아내는 주객전도이며 작반하장이며 본말전도라는 말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빗뚫어져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바로 잡기 위해 다시 재천명합니다. 본문 30-31절을 마지막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렇습니다. 다시 복음을 원 자리로 되돌려 놓으라는 강력한 선포입니다. 이제 본문 해석을 감당한 우리는 이런 분명한 역사적 팩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갈라디아교회에 성도들은 배교를 감행했으며, 그 뒤에 더더군다나 바울이 설명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율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을 인정하지 않고 몽학선생의 지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을까? 에 대하여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본문을 시작하는 21절에 천착해야 합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이 구절을 왜 중요한 질문의 답으로 제가 제시하였을까요? 이 구절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적어도 이 구절을 깊이 해석하면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무너뜨렸던 자들 즉 율법주의 교사들은 본인들도 아브라함의 두 아내와 아들에 대한 이해도에 있어서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면서도 왜 그들은 진리를 내동댕이쳤을까요? 고의적으로 거부한 것 입니다. 아니면 조금 양보해서 미필적 고의라는 범죄에 넘어간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복음과 율법에 관한 상관관계를 알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의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면 율법을 가지고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본인들의 자리가 위태해 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인 앎을 실천적인 삶으로 연결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알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 신앙이란 깨달았으면 바꾸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적어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비극은 이미 알았던 은혜대로 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13:23절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구주이심을 선언했고 그 능력은 그곳 사람들을 하나님의 군사들로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교회 지체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이미 맛보아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 능력을 미리 맛보아 알았던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능력에서 떠나게 된 이유는 그 복음의 능력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곧바로 주지해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능력은 앎에서 나오지 않고 삶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결코 등한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사기 11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입다 사사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입다가 암몬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사로 부름 받고 쓰임 받은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암몬이 섬겼던 일체의 우상들과 문화와 세속적인 가치를 진멸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암몬이 전통적으로 섬겨 왔던 우상 신이 바로 몰레크(몰렉)입니다. 몰렉 신에게 행했던 제의 중에 가장 악한 행위 중에 하나가 살아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바쳐서 번제의 희생 제물이 되게 하는 잔인한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입다의 전쟁이 암몬 신에게 드리는 인신제사를 끝장내는 전쟁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무엇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입다가 제일 먼저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서원 제물로 드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본인이 제압한 몰렉 신을 다시 추앙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납니까?입다의 앎과 삶이 유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몰렉의 신이 거짓인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야웨의 영이 임했기에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야웨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대로 살면 되는 것이엇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보란 듯이 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결론 : 제가 다니고 있는 탁구장에 저보다 부수가 낮은 회원들이 많습니다. 가끔은 그들을 상대해서 가르쳐 주어야 하는 선생으로 설 때가 있습니다. 상대를 하면서 약점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제시한 대안으로 자리를 잡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6개월 정도가 소비 된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 시간이 소요됩니까? 알았지만 옛 습관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옛 습관은 무섭습니다. 습관을 버리고 가르쳐 준 대로 패턴을 바꾼 자는 부쩍 실력이 느는 것을 목도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말씀이 권면하고 가르쳐 주는 대로 바뀌지 않는 백성은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신앙인이 아니라 그냥 구도인일 뿐입니다. 난 우리 세인 지체들이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여러분의 신앙의 패턴을 바꾸기를 원합니다. 미필적 고의의 범죄를 저지르는 영적 무능력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깨달았다면 변화되어 그렇게 사십시오. 그것이 신앙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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