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3-24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형들이 양을 치는 곳에 요셉이 이르자 그들은 갖고 있었던 물리적인 힘을 같이 동원하여 요셉의 채색옷(케토넷 파심)을 벗기고 그를 ‘보르’ 즉 ‘구덩이’에 던져버립니다. 요셉의 인생은 그곳에서 마감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긴장된 순간을 묘사한 본문 마지막 구절에 도착하자 한 단어가 대단히 크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성경에는 ‘빈 것’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레크’였습니다. 장로교신학대학교 하경택 교수는 이 대목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 구덩이는 우기에 물을 저장해 놓았다가 건기에 사용하는 물 저장소 역할을 한다. 다행히 요셉이 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그곳은 비어 있었다. 그래서 요셉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322쪽) 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는 교수는 ‘레크’에 대해 해석하며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 그럴 겁니다. 왜 아니 그러겠나 싶습니다. 하지만 구약학자들이 연구한 자료들을 살피고 공부하면서 현장에서 바로 그 구약을 설교하는 목사는 신학교 교수가 보는 관점보다는 해석의 스펙트럼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이라는 정글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구약 교수가 접근하기 어려운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자존감 때문에 저는 ‘레크’ 즉 ‘빈 것’이라는 단어를 보다가 울컥했습니다. 왜? 비어 있는 구덩이를 보며 현상적인 일 ‘다행히’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조각하심’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던져진 도단의 구덩이는 왜 비어 있었을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살리기 위해 그 ‘보르’에서 이미 물을 빼셨든지, 아니면 물이 없는 ‘보르’를 미리 택하셨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둘 중에 그 어느 것을 선택해도 다가오는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감동입니다. (세인교회 10월 11일 수요저녁 예배 원고 중에서) 10월 11일 수요일 저녁에 교우들과 함께 나눈 창세기 120번째 강해에 담은 원고다. 작년에 한희철 목사가 쓴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독서를 마치고 북 리뷰에 이렇게 썼다. 내 서평 노트에 담겨 있는 원고를 소개한다. 예레미야 38:12절을 다시 읽어보자.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한희철 목사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제했다. “웅덩이에 빠져 있었던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힘이 없었을 것이다. 밧줄만 잡고 올라오다가 놓칠 것이 자명했다. 낡은 옷을 허리에 두르게 하고, 그것을 밧줄로 묶는다면 따로 힘을 쓰지 않아도 도움이 될 것이다. 헝겊과 낡은 옷, 헤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 바로 그것이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하나님의 손길로 확인하는 ‘헝겊과 낡은 옷’, ‘해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들’이라는 말 앞에 눈물을 그치기 어려웠다.”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271쪽) “해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들’이라는 말 앞에 눈물을 그치기 어려웠다.” 모든 목사가 한희철 목사처럼 이렇게 영적인 촉수가 예민한 것은 아니다. 물론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치열한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목사들이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치열하신 도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하심 등등에 영혼의 촉수가 예민하지 않은 자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느낄 수 없는 감동의 절정이기에 그렇다. 한 목사처럼 말씀을 읽다가 눈물이 나는 감동은 그것을 내게 주신 은혜로 1인칭화시키는 목사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어제 수요 저녁 예배 원고를 나도 울면서 썼다. 그래서 감사했다. 아직은 주님 때문에 울 수 있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