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심는 여인
교회 주변이 몰라보게 예뻐졌다. 주차장 화단, 교회 뒤편 정원도 그렇다. 태생이 차도남이라 원래 꽃과 나무 이름은 학창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익숙한 것들 외에는 전혀 문외한인지라 교회에 심겨진 꽃들도 내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보고 있노라면 무조건 예쁘다. 나이가 드는 증거 중에 하나가 산야가 보이고, 들풀과 꽃들이 보이며,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고, 땅이 보이는 것이라 누군가 이야기했던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이렇게 일갈한 이유는 나이가 듦이란 자연으로 돌아갈 시기가 가까왔다고 해석한 탓이다. 뭐, 그러면 어떠랴, 사실인데. 그래서 그런지 나 역시 산야가 보이고, 이름 모를 들풀과 꽃이 보인다. 교회 앞과 뒤에 심겨진 꽃들의 자태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점입가경이라 했다. 교회 뒤 정원은 심겨진 꽃들과 3년 전 즈음에 한 지체가 계획하여 심은 포도나무가 이제는 어엿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성장하여 아직은 설익은 푸른색이지만 포도송이들이 옹골찬 모습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 것까지 함께 볼 수 있어 마음이 한결 더 풍요롭다. 꽃을 심은 지체는 누가 관심을 갖든지 안 갖든지 중요하지 않은 듯 화단을 사랑했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강렬할 때는 땀을 흘리며 심었다. 물이 부족하면 손수 화단에 물주기와 거름주기까지 하며 교회 주변을 가꾸었다. 오래전 장 지오노의 동화인 ‘나무를 심은 사람’에 등장하는 엘제아르 부피에르와 같은 마음으로 꽃을 심은 지체로 인해 이제 세인 교회 주변 환경이 너무 예뻐졌다. 볼 때마다 웃음을 주는 환경으로 탈바꿈했다. 감사하기 그지없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젊은 그룹은 교회에 대해 애정이 선배들이 갖고 있었던 애정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아예 관심조차 없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세대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꽃을 심은 지체는 이런 젊은 세대에게 소리 없는 울림을 준 선배이기도 하다. 왜? 교회는 내가 사랑해야 하는 교회임을 직시하도록 교훈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꽃을 심은 지체는 이제 산수(傘壽)에 도착했다. 그러기에 담임목사는 더 더욱 머리가 숙여진다. 허리를 굽히는 것조차 힘들어할 팔십의 연수를 채운 지체가 꽃을 심기 위해 엎드린 모습은 말 그대로 거룩한 노동을 감당하는 삶의 성직자가 아닐 수 없다. 교회를 둘러볼 때마다 아름다운 꽃의 자태와 향기를 느끼게 해준 전갑규 권사님께 존경과 감사의 머리를 숙여 본다. 더불어 권사님이 강건하기를 화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