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1-3절을 읽어보자.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섬기는 교회에서 느헤미야 강해를 시작했다. 어제 본문 텍스트 중에 한 구절이라 교우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느헤미야의 형제 중 한 명인 하나니와 두 세 명 정도의 동행인들이 예루살렘에 다녀온 뒤에 느헤미야에게 보고한 예루살렘의 상황이다. 이들이 보고한 내용 중에 눈 여겨 본 뒤에 주석적 설명을 해야 하는 문구가 보였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은 골라 공동체의 지체들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들이 당하고 있는 내용 즉 큰 환난을 당한 것, 능욕을 당한 일,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진 일, 성문이 붙 타버린 일에 대한 해석이었다. 교우들에게 이 일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필요했다. 이럴 때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구약성서학자들의 주석이다. 느헤미야 주석 중에 내가 참고하고 있는 일련의 도서들은 유감스럽게 1:3절에 대한 해석을 유보하고 있어 답답했다. 트론 베이트의 현대성서주석-느헤미야는 침묵했고, 야곱 마이어스의 국제성서주석-에스라,느헤미야도 에둘렀지만 명쾌한 주석을 유보했다. 반면 존 마틴, 진 게츠의 BKC 주석은 하나니의 보고를 에스라 4장에 기록되어 있는 르흠과 심새의 고소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고난의 형국으로 몰고 가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 사건인 하나니가 보고하고 있는 시기로 계산할 때 무려 76년이 지난 연대적 시기인데도 말이다. 신학교 후배인 소형근 박사는 조금 더 나아갔다. “2절에 나오는 유다지역에서의 ‘사로잡힘’에 해당하는 사건은 무엇일까?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붕괴되던 기원전 587년의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 사건은 에스라 4:23절에 나오는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 일행이 아닥사스다 조서 이후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유다 사람들을 권력으로 억압하고, 성전 재건을 방해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형근,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주석-느헤미야”,대한기독교서회, p,27.) 아무리 구약학의 전문가가 밝힌 해제이지만 설교자로서 수용하기가 거북하기 짝이 없는 해석이다. 설교자로서 비판적 성찰 하나를 제기한다. 소박사의 해석이나 진 게츠 해석의 위험성이다. A=B는 명제다. A와 B는 같다는 설득이자 선포다. 소 박사와 진 게츠는 하나니가 느헤미야에게 보고한 내용을 에스라 4장에 기록된 르흠과 심새의 거짓 상소 사건으로 정의했다.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중단 된 시기를 주전 520년까지이고, 다시 재건이 시작되어 완공된 시기를 주전 516년으로 성서는 증언한다. 에스라 4장은 에스라의 회고 장면이다. 약 6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회고한 장면이다. 그로부터 14년 정도 지난 시기에 느헤미야 1장에 기록된 하나니의 보고 중에 예루살렘 성읍에 대한 황폐함을 주전 520년까지 중단되도록 만들었던 르훔과 심새의 사건으로 확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하나니의 보고를 어떻게 해석하도록 돕는 것이 구약학자들의 몫인가? 어제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지점에서 막혔다. 출신 교회 후배이자 한영신대 정석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조를 읽는 말라기’라는 제하로 출판된 후배의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으며 공부했던 기억이 있어 에스라-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더 말라기로 주전 6세기부터 3세기에 대한 이해 폭이 남다른 후배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후배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하나니가 느헤미야에게 보고한 비극적 보고는 주전 587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 성읍에 대한 악몽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성읍에 있는 자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보고인 듯합니다.” 소 박사나, 진 게이츠처럼 하나니의 보고를 특정 사건으로 정의하여 착시현상을 일으켜 착각하게 만드는 해석이 아니라, 선민공동체가 입었던 가장 강력한 고통이었던 솔로몬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라는 그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귀환 공동체인 골라 공동체 일원들의 고통을 호소한 메시지일 수 있다고 통전적으로 해석하며 귀띔 해 준 후배의 일설에 감사했고 동의했다. 정 교수의 일갈을 받으면서 동시대 예언자였던 학개 2:3절의 한 단어가 내게 매치되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제 2성전을 재건했던 골라 공동체의 남은 자들이었지만 그들이 본 스룹바벨 성전은 어떤 의미에서 ‘보잘 것이 없는’ 성전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트라우마가 그들에게는 지속되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읍 백성들의 그 고통이 하나니의 토로 속에 그대로 담겨져 느헤미야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를 설득하는데 충분했다. 구약학자들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나 같은 설교자를 위해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해석의 폭이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두기를 부탁한다. 구약학자들의 특정은 설교자에게 비평적 성찰 없이 전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맞으면 다행이지만, 틀리면 매는 설교자가 맞는다. 왜? 구약학자들은 최후의 보루들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