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나를 울린다.(鳴) 시인이 노래했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9:97) 나는 시인의 이 마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새벽에 예배에 나온 교우들과 나누었지만 당일 새벽예배 큐티 텍스트였던 야보고서 4:5절이 얼마나 나를 울렸는지(鳴) 모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개역개정판 번역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번역을 새벽 큐티를 준비하면서 표준 새 번역과 현대인의 성경 번역을 대조하며 읽어 보았습니다. 이 두 번역은 아주 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었지만 도리어 더 행복해졌습니다. 공동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살게 하신 성령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전자는 시기할 정도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으로 이해한 번역이고, 후자는 주체가 성령 하나님으로 바뀐 이해의 번역입니다. 읽다가 이런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누구면 어때? 두 분이 다 시기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면 됐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울고, 성령님의 사랑 때문에 또 우는 우리들,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걸 묵상에서 찾습니다. 이걸 큐티를 통해 발견합니다. 큐티와 묵상에 대해 세부적으로 어떻게 맞느냐고 신학적으로 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일 참 없는 사람들입니다. 할 일이 그렇게도 없나 싶습니다. 까짓 거, 뭐, 그러려면 그러라지요. 큐티면 어떻게 묵상이면 어떻습니까? 그게 뭐 그리 대수입니까? 큐티든, 묵상이든 시인의 고백처럼 말씀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 되는 것이지요. 시인처럼 이 은혜를 알고, 이 감격을 알고 반응하면 됩니다. “주의 법(말씀)을 하루 종일 읊조리는(하가) 기쁨” 히브리어 ‘하가’는 새가 조잘조잘 대는 것을 의미하는 의성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달아서 하루 종일 내 입에서 찬양처럼 조절조잘 대는 읊조림을 2023년, 새벽에는 큐티로,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는 묵상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이것보다 행복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어 저는 벌써부터 행복해 집니다. 말씀에 밑줄 친 사람이 삶에도 밑줄 칩니다. 말씀에 밑줄 칠 근거가 없는 사람이 삶에 밑줄을 칠 리 없습니다. 2023년은 묵상으로 또 다른 성숙의 승부수를 던지려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말씀을 경홀히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마크 뷰캐넌 목사의 말대로 나를 가장 해롭게 한 위험한 책이라고 그들은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위험하니까 내게 가장 소중한 책이라는 것을. 나는 2023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다바르)이 세인 지체들 모두에게 성육신하셔서 나를 울리는(鳴) 레마가 되기를 화살기도 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