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부터 세탁기가 말썽을 부렸다. AS 기사가 와서 사용 년도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고객님, 이 정도 쓰셨으면 정말 많이 쓰신 겁니다. 제가 AS를 많이 다니지만 이 정도로 오랜 쓰신 고객은 보지 못했습니다.” 왜 아니 그러겠나 싶다. 제천에 이사를 와서 막 구입을 한 것이니 햇수로 19년째에 들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조금 더 쓰겠다고 AS를 받았지만, 결국 메인보드가 나가 멈춰 섰다. 계산을 해 보니 메인 보드 교체 가격과 신제품 구입 가격이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아내가 18년 만에 세탁기를 구입하기로 전격적으로 용단을 내렸다. 객담(客談) 하나, 2년 전에 서재에 있는 턴테이블을 교체했다. 더 이상은 수리해 서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혼수품으로 사가지고 온 물건이니까 당시를 기점으로 29년을 쓴 셈이다. 요즈음이야 국산 전자제품이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30년 전만 해도 전자제품은 10년 쓰면 수명을 다했다고 말하던 시절이었으니 29년 동안 턴테이블을 쓴 것은 내 딴에는 고군분투한 셈이다. 필요에 따라 소모품들이야 교체했지만 본 기기를 30년 동안 쓸 수 있었던 것은 관리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목회 30년 동안 지금 사택에 정착하기까지 꼭 10번 이사를 했다. 적지 않은 이사 경험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준 살림살이들이 있어 고맙기까지 하다. 이제 살림살이들을 장만할 때마다 아내와 난 생의 마지막 구입이라는 생각을 하며 구입한다. 그러기에 구입을 할 때 신중의 신중을 기한 뒤에 구입한다. 동시에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고 사이트에 방문하여 중고품(second hand)을 구입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지만, 아주 드물게 신제품으로 구입할 수 없는 절판된 중고서적을 알아보기 위해 중고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젊은이들이 사용하다가 식상하여 판매 처분하려는 내용물들을 보면서 경악할 때가 많다. 과장이겠지만 그들의 내용물을 보다가 이런 추세라면 사람도 중고가 되면 팔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기겁하는 물건들이 보인다. 지구가 매우 아픈데 국가도, 개인도 편리함에 익숙하여 인간에게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마구잡이로, 랜덤으로 쓴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 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선생이 남긴 산문시의 한 구절이다. 승려 법정도 말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내려놓음, 비움”이라고. 이런 삶을 더 훈련하고 실천하려고 한다. 아내가 결심하여 18년 만에 새롭게 장만한 세탁기를 보면서 살림을 하면서 절제된 삶을 살아준 아내에게도 감사하고, 살아남아준 살림살이들에게 감사하다. 이 글을 쓰는 서재에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가 콜라보로 부른 ‘퍼햅스 러브(Perhaps Love)’가 환상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사족 하나, 이 LP도 중고다. 수년 전, 지인 권사님이 유럽 여행 중에 제 생각이 나서 구입해 온 LP인데 매장에 들렸더니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의 협연 메뉴 판은 중고밖에 없다고 해서 사가지고 오셔서 수줍게 내민 물건이다. 감사하다는 최고의 극찬을 드리고 받은 이 LP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장품 중에 하나다. 중고면 어떠랴! 음악과 사람이 최곤데. 세월은 흘러갈수록 물건들은 퇴색해 가지만, 바라기는 하나님의 걸작(masterpiece)인 우리들은 날마다 속사람의 모습은 더 아름답고 견고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