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하얀 와이셔츠는 입지 마세요!” 주일 아침, 예배를 인도하러 나가기 위해 옷을 입을 때 아내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순간 직감했다. 최정희 집사가족에게서 오늘, 내일 연락이 올 것을 아내가 짐작하고 있었음을. 이런 예언의 能은 애석하고 슬프게도 빗나가지 않는다. ㅠㅠ 드디어(?)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한 최 집사를 오늘 새벽 호출하셨다. 이제 벌써 6개월 즈음이 되어간다. 상태가 그런 데로 괜찮았던 시기에 병원 심방을 갔을 때, 최 집사께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만나서 너무 좋고 행복했었어요.” 순간, 주저앉을 뻔했다. 차라리 여 집사가 나를 좋아한다는 고백 때문이었다면 그냥 구설수로 한 번 홍역을 치루면 끝나는 일일 텐데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아마도 그때부터 이미 최 집사는 본인의 죽음을 예상했던 것이었다. 최 집사의 말을 듣고 멋쩍게 싫은 소리를 했다. “집사님, 왜 과거 시제로 말해요. 건강해져서 지금이 더 좋아한다고 현재 시제로 말해야지.” 빙그레 웃는 최 집사 때문에 가슴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1년 전, 발병 사실을 알리고 기도부탁을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로 전심으로 그녀를 살리기 위해 중보 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목사질 30년을 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한 판 뜨고 싶었다. 내가 이러려고 목사가 된 게 아닌데. 위렌 위어스비 목사가 말했다. “고난이란 변장하고 찾아오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C.S 루이스가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통해 속삭이고 양심을 통해 말씀 하시며 고통을 통해 소리친다고. 그래서 고통이란 귀머거리 세상을 일깨우는 그분의 메가폰이라고.” 너무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가 잘 안 들린다. 상주를 만나서 장례일정을 상의하고 첫 번째 임종 예배를 드렸는데 벌써 숨이 막힐 것 같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이 예배를 정말로 인도할 수 있을지 너무나 고통스럽다. 아내에게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했다. “여보, 이번 장례는 할 수만 있다면 강사 초빙하고 싶다.” 하늘이 노랗다. 어떻게 장례를 담대하게 치루며 하나님 나라에 사랑하는 딸을 파송할지. 꼭 4년 전에 쓴 목양 일기다. 이제 최 집사가 내 곁을 떠난 지 4년이 되어간다. 그리움이 여전하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인공동체를 지켜보며 응원할 것을 믿지만, 그녀가 떠난 4년이 되었지만 세인과 함께 했던 최 집사의 아름다운 추억은 현재진행이다. 그렇게 지난 4년 동안,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 역시 사랑했던 교우들이 한 둘씩 떠났다. 언젠가는 나도 떠날 텐데. 그래서 다시 옷깃을 여며본다. 지금 오늘을 아름다움으로 물들이자고. 그때 후회하지 않도록.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이성선 시인의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이번 달 초에 읽었던 이 시어가 가슴에 자욱하다. 다리를 조금은 천천히 건너야겠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