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어(book reviewer) 활동을 한지 이제 어언 10년 정도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초창기 신학교 동기 한 명이 저의 첫 출간 책을 다 읽고 나서 의미 있는 말을 네게 남겼습니다. “이 목사, 너무 귀한 글을 쓰느라 고생했다. 읽으면서 이런 리뷰가 있을까 싶어 행복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시(詩)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친구가 시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내 글이 건조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마음에 담았지만, 독서분량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정한 글들이 사회과학 서적이 많았던 터라 동의는 했지만 쉽게 이동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나희덕 시인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시인이 있지만 그녀의 시를 읽을 때 제일 많이 울컥해서 울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랬나, 이후 출간한 서평집에서 그녀의 시를 많이 인용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의 시에 빠지면 잘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녀가 쓴 시를 읊조리다보면 곡비(哭婢)가 내 안에 새겨지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 물들/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닳아지는 살 대신/그가 입혀 주고 떠나간/푸른 옷 한 벌/내 단단한 얼굴 위로/내리치며 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분노와 사랑의 흔적/물 속에서만 자라나는/물 속에서만 아프지 않은/푸른 옷 한 벌” (“그곳이 멀지 않다” 중 ‘이끼’, 민음사, 1997,p,64.)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왜 그랬지? 펑펑 울었습니다. “썩을 수 있다는 것은/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일종의 무릎 꿇음이다”(위의 책 중 ‘부패의 힘’에서,p,64.) 천재적 통찰입니다. 늦었지만 그녀의 시 뿐만 아니라 조금 더 많이 시와 놀려고 합니다. 가끔 저는 시인을 천재라고 평하는 데, 더 좋은 표현이 있으면 시인들에게 붙여 주고 싶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할 때, 나는 할 수 있으면 영시를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중간에 변심하여 목사가 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제 환갑의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은 둔재인 탓에 시까지는 쓰지는 못하겠지만, 시와 더 깊은 친구가 되는 것은 해 보렵니다. 지난 주, 아내와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던 장소에 가지고 갔던 시집 ‘유리병 편지’에 담긴 시어를 들려드립니다. “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내 열심을 따라 피어날/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에서)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 오초’에서) 이 글을 쓰는 서재 창밖에는 가녀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내 존재에도 비가 새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