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죽음 앞에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도 반드시 죽는다. - 라고 했던가! 인간이 죽음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아벨이 살해당한 후, 구속사의 계보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셋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노쉬’라고 지었는데 의미심장한 것은 그때부터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명시한 점입니다. 즉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교만이요,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그때부터 코람데오의 겸손의 신앙을 갖게 되는 일임을 교훈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두 죽음의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지극히 사랑했던 형을 보내야 하는 동생의 숨죽임의 아픔과 아버지를 하나님의 나라에 파송한지 불과 5개월 만에 어머니마저 하나님의 나라에 파송해야 했던 독자의 살 에는 아픔을 동반한 죽음까지 동통을 느끼게 한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비껴가지 않는 것이 죽음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잠시의 이별과 영원한 만남이라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하지만 나와 함께 이야기하고, 나와 함께 식탁공동체에서 희비를 논하며 떡을 떼던 사랑하는 가족을 졸지에 육신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남아 있는 자의 사무치는 고통을 어찌 제 삼자인 내가 같은 마음의 애절함으로 함께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찌 보면 나만 살아남아 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출하는 것 정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한테 죽음을 대비하게 해 주는 종교를 보여줘 봐요. 허무에 대비하게 해주는 종교를. 그럼 그 교회에는 내가 나갈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댁의 교회는 삶에만 대비하게 합니다. 꿈과 환상과 거짓에만.”(코맥 맥카시, “선셋 리미티드”,문학동네,pp,132-133.) 오래 전에 읽었던 서부의 셰익스피어라고까지 극찬을 받는 소설가 코맥 메카시가 내던진 현대기독교의 진보화에 대한 저항적 화두를 보다가 교회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궁극(窮極)의 사수는 영혼에 대한 구원의 확신성이라는 라는 은혜를 받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담임목사는 교회의 수구적인 근본주의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급진적인 진보화 역시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매카시가 던진 질문에 대해 궁색한 변명을 해서는 안 되며, 단호하게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가 예기치 않은 슬픔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절망을 당한 자에게 적어도 영적 소망을 주는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목사입니다. 특히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더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의 신전의식을 갖고 우리들의 남은 날을 잘 살아내도록 견인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해 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나간 것일까요? 그러니 죽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라고. 하지만 제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목사인지 언제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종이 섬기는 지체들 중에 그 누구도 제가 은퇴하기 전까지는 데리고 가시지 마세요.” 저는 하나님 앞에서 빵점 목사입니다. 이렇게 허약해서야….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