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서 소중하니까! 작년 초에 최은영 작가의 옴니버스 단편 소설인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었다. 그녀는 소설 쓰기를 끝내고 이렇게 후기에 썼다. “나쁜 어른, 나쁜 작가가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쉽게 말고 어렵게, 편하게 말고 불편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끼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문학 동네,p,324) 누구라고 말하면 다 알 수 있는 친구 한 명이 늘 나를 감시한다. 그는 언제나 독서하고 공부하려는 나를 응원해 주는 고마운 친구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나를 다그친다. “친구야, 글을 짧게 써라. 그리고 쉽게. 심지어는 강의도 참견한다. 언제든지 강의는 연역적으로 하지 말고, 귀납적으로 해야 한다.” 세뇌가 무섭다고 글을 쓸 때마다 그 친구가 어른거린다. 친구는 대학교 선생이라 그의 강의에 대한 충고는 민감하게 받아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강의에 대한 나의 노력은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이 판단할 일이지만, 정말로 최선을 다해 귀납적인 강의로 학생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남기려고 몸부림을 쳤다. 문제는 글쓰기다. 글을 쓸 때마다 친구의 냉정한 충고가 스멀대서 항상 부담이 충일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나도 안다. 글을 길게 쓴다는 것에 대한 진부함을. 독자들이 잘 읽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다가 최 작가의 에필로그를 만났다. 그녀의 한 마디가 얼마나 위로가 되든지. “쉽게 말고 어렵게, 편하게 말고 불편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끼고 싶다.” 2020년 들어 첫 번째 독서 서평을 개인 SNS와 홈페이지에 올렸다. 올리고 나서 보니 글 자체가 역시 불편하다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어렵다는 것도 안다. 순간 흠칫했지만, 최 작가의 고백에 용기를 냈다. “그럴 수 있는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난 승려 혜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던진 말 중에서 아주 가끔은 목사에게 위로를 주는 아딧줄이 있어서 그의 글을 펼칠 때가 있다. “내가 나임을 온전히 허락하는 순간, 내 안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껴안아주는 순간, 존재 안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도, 또한 될 필요도 없습니다.” (혜민,“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수오서재,p,270) 목사 안수를 받은 이래, 지난 28년 동안 난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다. 그것이 완벽하지 않으면 나를 쳐서 조각하며 그 누군가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또 만들어지려고 애쓰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않으련다. 하나님이 나를 조각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 평생을 통해 내가 달려갈 길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나이기에 나를 믿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나도 나를 존중하며 살아야겠다. 왜? 내가 나를 존중해야 남도 나를 존중한다는 것을 미련하게도 근래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년 연말에 치열하게 공부한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말이 나를 벼락처럼 타격했다. “인간됨은 존재의 인간화요, 의미 없이 주어진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변질시킴이다.” (헤셀, “누가 사람이냐?”,한국기독교연구소,p,124) 타 존재의 인간화를 위해 나의 나 됨에 대한 의미 없어함이 목사가 된 죄로 인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아니, 그것을 헌신으로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나 됨의 의미 있음도 중요하게 귀 기울이며 살려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래, 나는 나로서 소중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