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성탄절 자락에서
제천에서 성탄의 절기를 보내는 것이 금년 들어 열넷째 해를 맞이했습니다. 14년 전, 40대 중반의 한 참 나이에 제천에서 맞이한 성탄의 기억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처럼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께서 성탄의 주인이셨습니다. 허나 14년이 지난 2018년의 성탄의 자락에 예수의 자국을 만나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성탄 특집과 관련한 콘텐츠들이 아기 예수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범신론적인 내용들로 넘쳐 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성탄의 계절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전령과도 같은 거리에서 울려나오는 그 흔한 크리스마스 캐럴마저도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입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아니면 말구유의 강보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께 선물을 드리기 위해 경배하는 동방박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성탄절 카드로 안부를 묻는 것을 대신해서 SNS를 수단으로 안부를 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새벽송은 사람들에게 소음이라는 이유 때문에 폐지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은 프로그램 성탄절을 보내기에 급급합니다. 해서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감동의 스토리 대신에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위상을 지켜 나아가는 이유는 성탄의 절기에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참된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아마도 페루가 낳은 위대한 시인 ‘세사르 바예흐’가 ‘같은 이야기’에서 소개한 한 구절의 시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주 아픈 날”
성탄절은 곧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겠다고 결단한 날입니다. 동시에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아픔이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성탄은 ‘신이 아픈 날’ 이라고 적시한 세사르 바예흐의 시어가 적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신의 아픔을 느끼고 동참하고 사유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기념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결단하신 대속의 그 아픔에 나 또한 젖어드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당신’과 ‘나’라는 세인의 지체들만큼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