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기는 은혜였습니다.
지난 주간, 기도원에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하반기에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만만하지 않기에 기도하고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기도 굴에서, 산상 기도처에서 하반기에 감당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을 아뢰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이든 토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외로웠다. 외로움이란 성도가 그의 성스러움을 위해 지불해야하는 대가인 것 같다.” 미국이 내세울만한 사회학자인 데이빗 리스먼이 갈파한 고독이라는 정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커뮤니티가 대체적으로 세 가지의 형태를 지녔다고 보고하였는데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그리고 타인지향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최근의 커뮤니티를 ‘타인지향형’이라고 정의합니다. 가장 발전된 인간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헌데 기막힌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최고의 현대적인 과학 메커니즘으로 수없이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리스먼은 ‘고독한 군중’이라고 정의했으니 말입니다. 이상한 역설입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는 저는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리스먼의 정의와 그의 학문적 기여를 접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고도한 군중’들 사이에 고독하게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자’는 아닐까? 의 정서적 동의 말입니다. 뉴질랜드 성서대학 교수를 역임한 선교사이자 신학자인 오스왈드 샌더스는 그의 걸작인 ‘영적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모든 지도자들은 외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언제나 자기를 따라는 자들 앞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지도자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p,191) 조카 롯이 제 길을 갔을 때 척박한 헤브론 지역으로 가야했던 아브라함, 금송아지를 돌 판으로 부수고 다시 산으로 홀로 올라가는 모세, 850명과의 치열한 영적 전투 현장에서 엘리야까지 모두가 혼자였습니다. 혼자서 그 길들을 가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길이었을까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군대 장관인 랍사게로부터 항복문서를 전달받고 무릎 꿇을 것을 압박 받았을 때, 해서 그 문서 종잇장을 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을 때, 느헤미야가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의 중상모략으로 살해의 위협을 수도 없이 당했을 때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포로 귀환 공동체의 무지함을 딛고 가야하는 길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내가 여호와를 전하지 않으면 내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고백했던 엘리야, 거짓 예언자 아마샤와 한판 승부를 벌릴 동안 자기를 응원해 주던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아모스의 고독은 또 어땠을까, 소위 말하는 ‘왕의 도로’를 도보로 걸으며, 타우르스 산맥을 넘을 때 산적의 위험을 비롯한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신변을 공격하는 일체의 일들과 싸워야 했던 바울은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미루어 짐작해 보면 이들은 모두가 고독한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었고 또 그 길을 인내하며 걸은 뒤에 하나님의 사람들로 우리에게 선명한 영적인 자국을 남긴 믿음의 선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능하면 피하려고 하는 것이 외로움과 고독이지만 한 주간 동안 그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조금은 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성숙한 걸음을 걸은 것 같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홀로 있기는 은혜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