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하는 그리스도인 작고하신 고 박경리 선생은 유고 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 간, 2013.)에서 후배 소설가인 박범신에 대하여 단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히말라야에서/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어머니!/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p,96) 박경리 선생의 이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아마도 진한 동의의 표현이리라. 선생이 한참 후배 소설가를 보고 이렇게 섬세한 필채로 평할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도 선생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감성과 지성의 내공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더불어 선배로부터 극찬에 가까운 평을 받은 후배 소설가 역시 어떻게 히말라야의 노새를 보고 어머니를 연상할 수 있었을까. 역시 그만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공감의 능력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감성과 지성의 내공, 그리고 문학적 공감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건 재론의 여지가 없는 독서력에서 온다. 독서는 인간을 사유하게 하는 도구이다. 다른 축을 말해보자. 인간이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이유는 사유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오감에 흡족한 것만을 추구하며 말초적인 것에만 목을 거는 이유는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함이 없다는 것은 독서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참으로 아프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년에 걸쳐 출간한 필자의 졸저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교회에서 소박한 북-콘서트를 지난 달 가졌었다. 행사를 알리는 초대의 글에 근래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일본 지성계의 큰 별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밝혔던 한 글을 소개했다. “이상한 현상과 만나는 것은 인간이 건전한 적응 능력을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청어람 미디어 간, 2014년,p,242.) 서로의 역설이 보인다. 이상한 현상과 인간의 건전한 능력 함양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역설이 통쾌하다. 이상한 현상을 만나야 인간이 건전한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이 말이 필자에게는 절감되니 말이다. 궤변인가? 그럴 리가. 필자는 이렇게 다카시의 말을 노트했다. 이 역설이 서로 통하는 것은 사유함 때문이라고. 왜? 이상한 현상을 만나는 당황스러움과 곤혹스러움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유익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은 드디어 생각하는 사유함과 성찰함을 시작할 수 있으니 너무 친한 관계이지 않은가. 그렇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은 독서를 함으로서 시작되는 사유함이다. 메이지대학 교수인 사이토 다카시가 독서의 소중함을 말하는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걷는 나무 간, 2015년) 의 프롤로그에서 이런 글감을 던져주었다.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모습으로 살고 싶다면, 단단한 내공을 쌓아 삶의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우리가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은 한정되어 있어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깊은 내공을 쌓는 데 필요한 재료의 질과 양을 더하는 행위이다.”(p,8.) 필자는 언제나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는 대목이 있다. 손에 잡는 책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저자들의 필살기이다. 이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 피 흘림이 있는 노고와 수고를 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런 일을 경험할 때마다 난 작아진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독서의 내공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독서를 해야 한다. 왜? 조금 과격하게 답하고 싶다. 그래야 세속적 가치와 맞장 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속적 가치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무모하다. 세속적 가치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렇게 폄훼될 만큼 형편 없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교회가 물러서고 싶지 않은 학습화된 교리적 교만과 지고 싶지 않은 아집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세속적이고 유물론적인 사상들이 교회를 향하여 공격할 때마다 항상 민감하게 분석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 이유는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더 솔직하게 세속의 가치가 말하는 교회의 태도, 그리스도인을 향한 쓴 소리를 진정성 있게 받았더라면 작금의 조국교회가 이 정도로 동네 샌드백이 되지 않았을 텐 데의 진한 아쉬움을 수없이 느낀다. 왜 세속의 소리가 맞는 소리가 많을까? 그것은 세속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는 그만큼 공부하지 않는 것 같아 아프다. 이명박 정권 시절, 불교계에서 이판승으로 존경받던 법정의 설법을 불교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날 그가 전해 준 너무나도 일상적인 불교적 영성에 대한 교훈은 상투적이어서 별로 기억에 없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한 마디 때문에 거룩한 분노가 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가 방송에서 이 말을 할 때는 당시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불도저로 밀어 붙이기를 하던 때였기에 받은 충격은 더 없이 컸다. “개신교에서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있는 그대로 자연을 보존하는 것일 텐데 그 창조의 섭리를 계승하고 보존해야 할 기독교 지도자 출신의 통치권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무시하고 파괴하고 있는 것은 그는 토목 말고는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이 끝나자 당시 강연에 참석했던 자들이 치는 박수 소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강하게 필자에게 들렸다. 이 소리는 적어도 현직 목회자인 필자에게는 불교계에서 기독교를 향하여 내리치는 서슬이 시퍼런 죽비 소리처럼 들려 오금이 저렸던 아픔이 생생하다. 이판승의 거목이었던 그의 말은 결코 타종교를 비하하거나 천박하게 매도하는 공격의 소리가 아니었다. 사이토 다카시의 말대로 무엇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아는 내공이었다. 그의 말을 듣다가 거룩한 분노가 시작되었다. 개신교 목사로서 공부하지 않는 게으름, 타성에 젖어 있는 상투성, 생각하지 않으려는 천박성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왠지 모를 분노 말이다. 적어도 법정이 사랑했던 책들을 추적하여 300여 권의 책들과 여행했다. 그 결과, 얼마나 필자 스스로가 교리적 테두리 안에 묶여 우물 안에서 퍼덕거렸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필자의 치열한 독서와 사유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공회대학교의 권진관 교수는 ‘신학이란 무엇인가?’(동연 간, 2017)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신학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우리들의 신앙(마음의 지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 근본적인 질문, 즉 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학문이다.”(p,12) 역사와 사회 앞에서 내 마음의 지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하기다. 필자는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디의 말을 할 때 결코 가볍지 않은 촌철살인이 되는 말들이 던져지기를 바라는 기대이다. 글쟁이 이기주는 ‘말의 품격’(황소북스, 2017)을 열면서 이렇게 말을 전했다. “사물의 형체가 굽으면 그림자가 굽고 형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바르다. 말도 매 한 가지이다. 말은 마음을 담아낸다. 말은 마음의 소리이다.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pp,9-10) 글을 읽다가 이런 소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말의 품격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도 언어의 품격은 그보다 더 높은 가치를 담고 있는 격상된 언어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회 말이다. 그러려면 들은 풍월로는 안 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던지는 한 마디가 높은 품격을 지니려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건 독서를 통해 비축된 사유의 내공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졸지 말자. 자지 말자. 쓸데없는 기계적인 노예에서 해방되자. 눈이 침침해지고 있는 필자의 애원이다. 칼 바르트의 말을 패러디하며 글을 맺고 싶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책을. 샬롬의 은총이 독자들에게 충만하기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