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이번 글은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데….”
두 번째 책이 출간되고 책을 받아든 아내가 웬일인지 긍정의 평가를 내려주었습니다. 평생 야당 당수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스멀스멀 용기가 생기는 것은 그동안 아내에게 그만큼 주눅이 들었던 탓임에 틀림없습니다. 책을 집필한다는 것은 저자가 되고 보니 얼마나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끝에 완성되는 고투(苦鬪)의 결과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친구가 언젠가 현존하는 구약학의 대가인 월터 브루그만 교수의 책을 번역하다가 ‘정말 포기하고 싶었다.’고 소회를 밝혔던 것을 기억하는데, 책 집필이야 재론의 여지가 있겠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출간하는 것은 미국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보려는 오기가 출간 이후에 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란 내 삶을 더 밝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김영사,p,334,) 두 번째 책을 집필하는 동안 저자의 글을 읽고 그 내용을 북 리뷰어(book-reviewer)인 제가 개인적으로 저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안에서 재해석하여 또 다른 공유할 가치를 찾아내려고 하는 씨름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매번 긴장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을 스스로 발견하고 저 또한 놀랐습니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마도 스티븐 킹의 말대로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일 것입니다. 여성 평론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레베카 솔닛은 작년에 저에게 참으로 많은 감동을 준 작가 중에 한 명입니다. 그녀는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에서 짜릿한 촌철살인을 남겨 놓아 밑줄 그어놓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책은 고독함,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독함이다.”(p,86) 저는 이 말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감을 표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기피하고 싶어 하는 이 정서적 상태인 ‘고독함’을 저는 대단히 즐겨하는 반골기질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엉뚱함 때문에 책과 놀기를 좋아하고, 또 놀기에 대한 평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 이상한 버릇까지 생겨 그것의 결과물들을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조그마한 흔적으로 남기는 은혜(?)가 저에게 임한 것 같은 데 그것이 제게는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처형이 저의 첫 번째 책인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동연 간, 2016년)을 읽고 이렇게 핀잔을 준 적이 있습니다. “시골이라는 단어를 앞으로 책을 낼 때 다시는 제목으로 삽입하지 말라고. 무슨 시골 목사 글이 이렇게 어렵냐고.” 근데 처형의 말에 반역했습니다. 이번 책의 제목도 ‘시골 목사’ 시리즈로 출간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첫 번째 책에 비해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해서 처형에게 나무람을 크게 당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계획은 금년 말까지 원고를 완성해서 세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으려는 것입니다. 다음 책은 북 리뷰가 아니라 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목양의 현장에서 좌충우돌한 시골목사의 너덜너덜한 목회 이야기 원고가 약 1,000페이지 정도로 정리되어 있는데 잘 다듬어 보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시골 목사가 본 마가의 복음서 여행’을 통해 민초들이 본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의 균형을 잡는 무모한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 동안 복음서에 대한 책들은 전자이든 후자이든 극명하게 갈려 출판 된 것이 거의 대부분의 상례입니다. 이 상례에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독자들의 평가가 어떻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믿고 그냥 내 식으로 달려 가보렵니다. 왜?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부족한 사람을 위해 중보해 준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아, 아내가 칭찬하니 갑자기 교만해졌습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앙망하나이다. |